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10.22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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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아침, 저녁으로 서늘하다 못해 쌀쌀한 공기가 느껴진다. 절기상 가을이지만 여전히 낮에는 반소매를 입을 정도로 따뜻해 여름과 겨울 사이 그 어딘가를 계절이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정확하지 않은 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아침마다 아이들의 옷을 골라주어도 끝내 바람은 날카롭게 아이들의 몸을 파고들어, 기침과 열을 동반한 독한 감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올해도 역시 피해 가지 못했다. 첫째 아이가 고열과 장염으로 한동안 앓더니 겨우 회복되었을 때쯤, 기다렸다는 듯이 둘째 아이의 고열이 시작되었고 독감 판정을 받았다. 여러 사람의 이해를 받아 아이 곁을 지킬 수 있었지만, 작은 몸이 버티기엔 너무 강한 고열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약 기운에 까라져 누워있는 아이를 볼 수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누워 있다 잠든 아이를 보며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쯤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학교폭력의 생존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방송으로 얼굴을 알린 그녀. 많은 이들이 그녀가 학창 시절 내내 겪은 잔인한 폭력들을 들으며 공분했다. 그 기세에 힘입어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회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의 아픔까지 함께 어루만져 주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얼마 전, 당당하게 잘 버티는 듯했던 그녀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의 응원과 격려, 그리고 실질적인 후원금까지 받아 학교폭력 피해자를 위한 단체까지 설립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그녀가 운영했던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보았다. 이미 많은 이들이 다녀간 흔적이 댓글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를 향한 추모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몬 장본인이라고 지목된 이에 대한 비난이 뒤섞여 아주 엉망진창이 된 화면을 한참 읽어 내려가다 마음이 울컥해 휴대전화를 바닥에 엎어버렸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생의 절반은 학교폭력 속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 폭력이 가져다준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다 떠나버린 그녀가 그저 너무 불쌍했다. 그리고 이제는 유족이 되어버린 그녀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아이들이 연달아 아픈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마음도 이렇게 황폐한 데, 이제 겨우 학창 시절의 지독한 상처를 딛고 일어나 잘살아 보려고 했던 꽃다운 딸을 이리 허망하게 보낸 그분들의 마음은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같은 피해자들에게, 아니 생존자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은 꼭 누군가 죽어야 어떤 변화의 씨앗이라도 뿌려지는 아주 악한 관습을 가지고 있기에, 내 한목숨을 바쳐서라도 나와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없도록 하고 싶다는 정의롭고 자애로운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이 사회는 피해자 혹은 생존자들의 울타리가 되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당신이 내디딘 한걸음에 대한 대가를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그녀가 너무도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표현한 단어 `생존자'의 뜻 그대로 생존에만 집중했다면 최소한 지금, 이 순간 살아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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