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도청탈취와 교통대의 충북대 귀속?
일제의 도청탈취와 교통대의 충북대 귀속?
  • 박일선 동화작가
  • 승인 2023.10.1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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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박일선 동화작가
박일선 동화작가

 

긴 세월 지역의 꿈이 있었다. 고속도로 개통과 4년제 대학 설립, 대전을 거치지않고 서울로 바로 가는 철도다. 경부·중앙고속도와 경부·중앙선으로 `수도권-영남'이 연결된 인근 지역이 늘 부러웠다.

평양 버금가는 도시로 늘 역사 중심에 있던 지역 추락에 대한 시민들의 박탈감은 작지 않다. 그 연유는 도청 탈취다. 대웅춘봉(大熊春峰)은 `청주연혁지' 관찰부의 이전(觀察府の移轉)에 썼다. 동학과 의병 중심지인 곳에서 안정적 통치를 할 수 없었던 일제는 경부선개통과 함께 통치가 쉬운 청주로 번개처럼 보따리를 싸서 달아났다. 그는 1908년 6월5일 청주민에겐 잊을 수 없는 기념일로 자손에게 전해 `청주의 날'로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임란 때 충주는 초토화됐다. 1602년 피해가 적은 공주로 감영이 이전됐다. 이로써 태조4년(1395년)에 설치돼 207년간 54개 고을을 다스리던 `충주감영'은 사라졌다.

하지만 한양과 영남, 강원을 잇는 물길과 뭍길 덕에 그 참화를 딛고 경제정치군사문화 중심으로 성장했다. 1895년 5월26일 공포한 칙령 제98호에 의해 23부(府)로 될 때 충주는 용인, 영월 등 20개 군을 관할하는 부청(府廳) 소재지가 된다.

이듬해 8월 4일 칙령 36호로 지방제도 개정건이 반포돼 13도(道)로 변경될 때도 관찰부였다. 이런 곳이기에 대접주 세 분(손병희·신재련·서장옥)이 한 고장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동학이 강했다.

또한 1896년 1월 4일엔 호서의병이 충주성을 탈환하는 등 항일운동이 극렬했다. 결국 일제가 줄행낭치니 바로 도청이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충주사범학교는 왜정(倭政) 때 저들의 천왕을 높이 받들며 침략전쟁 교육을 했던 충주심상고등소학교 자리에 식민교육을 떨쳐버리고 민족교사 양성을 위해 1946년 7월2일 설립됐다. 군사정권에 의한 폐교와 청주교대로 흡수가 발표되자 지역민은 저항했다.

그 대가로 1962년 충주공업초급대가 생겨 충주대가 됐다. 청주과학대와 철도대가 하나 돼 교통대로 거듭났다. `충주대'라는 명칭에 `청주과학대'와 `철도대'를 담는 것은 어색하다. `한국교통대학교'로 교명을 정한 것은 바람직하다.

통합의 흠을 딛고 성장하던 때 `충북대 귀속'이라는 폭탄이 터졌다. 교육부 뜻대로 혁신(?)하면 연 200억씩 5년간 지원하겠다고 한다. 충주대, 과학대, 철도대, 충북대로 나누면 얼마나 되며 정작 학생들 수업료는 몇 푼이나 경감될까? 수많은 학생과 직원, 교수는 어디서 줄일까? 학사촌 빈방은 누가 책임지나! 부결됐으면 끝이지 재투표해서 귀속 찬성을 만들어낸 것은 심각한 하자다.

이번 국감을 통해 모범적인(?) 지난 총장선거 관련자들의 뛰어난 논문들, 관련 절차를 점검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대로 행복하고 싶어서 싸우고 있다. 교통대도 교통대로 행복하고 알차게 꾸려가고 있다. 세상에는 미중러만 있지 않다. 작은 나라가 많다. 행복을 뺏지 마라. 충주를 한없이 청주에 굴복시키려 하지 마라. 이는 청주시민의 뜻도 아니다. 청주중심의 충북역사는 115년에 불과하다. 역사는 순환한다. 세상은 빵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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