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 할머니에게
팥죽 할머니에게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3.10.1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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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백 년 전 혹은 천 년 전에 살았을 팥죽 할머니를 생각해 봅니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옛이야기 속에 할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으나 가족 없이 홀로 살고 계시는 듯하고,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주변을 살필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분인 듯 합니다. 성별은 물론 신분에 따라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 정해져 있던 시절이니 여인으로서 농사를 지으며 홀로 살기가 여의치 않았을 겁니다.

`팥죽할멈과 호랑이/시공주니어'란 그림책 속 할머니는 팥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지내셨더군요. 대낮인데도 밭에 호랑이가 출몰하는 걸 보니 마을과는 좀 떨어진 산중에 밭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화전을 일궈 만든 밭이지 싶네요. 할머니의 어려운 삶 일부이며 일상이었을 팥과 호랑이,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인 현재까지 할머니를 아주 유명하게 만든 소재입니다.

지금도 동짓날이 되면 어김없이 팥죽을 끓여 먹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동짓날, 팥 냄새를 집안에 풍기면 잡귀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풍습 때문이지요. 이야기 속에서도 호랑이에게서 할머니를 구해줬으니 팥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긴 한 것이지요. 그런 연유로 할머니는 `팥죽할멈'이란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림책 동아리에서 할머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들을 모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들 뿐아니라 어른들도 찾아 읽고 있으니 유명한 거 맞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호랑이에 대항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팥씨 뿌리던 따스한 봄날 밭에서 마주친 호랑이를 팥죽 쑤어 먹을 겨울 즈음까지 기다려 달라며 위험한 상황을 모면한 용기와 재치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팥죽을 먹으러 호랑이가 오면 죽을 것이 뻔한데도 대책은 세우지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할머니가 살던 시절은 규범에서 어긋나는 것이면 상상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강자인 관리와 양반에겐 순응해야 하고 주어진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상황이 애석하기도 하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며 이야기했답니다.

순응하는 태도는 주도적인 삶의 언저리만 헤매게 하지요. 저도 어른들에게 순응하며 살아온 시절이 있기에 잘 안답니다. 닥쳐올 위험을 인지하고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몰라 걱정만 하는 모습은 예전의 저를 보는 듯해서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다행히 할머니에게는 지게, 알밤, 자라 등 주변 인물들이 있어 잘 마무리되었지요. 나누며 살았던 할머니의 성품 덕이었던 거 같습니다. 약자들이지만 서로 힘을 합쳐 강자인 호랑이를 물리치는 모습은 지금도 아이들에게 교훈이 되는 대목입니다.

제가 살고있는 2023년은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한 대로 시도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할머니처럼 홀로 된 여성이 가정을 꾸려 가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혼자서도 경제활동을 하며 가족을 건사한답니다.

할머니가 살던 그 시대와 많은 상황이 달라졌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남녀 구분하지 않고 받는 의무 교육, 직업 선택의 다양성 등 여건이 좋아졌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더불어 현실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속의 여인들이 보여준 삶의 지혜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유산이 되었지요.

2023년을 살고있는 모든 팥죽할멈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그 어려운 시절 살아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2023년을 보내는 팥죽할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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