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괜찮다
  •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09.2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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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여름비인지 가을비인지 모를 비가 며칠을 원 없이 쏟아지더니 금세 날이 선선해졌다. 이제는 아침에 얇은 긴팔이 아니면 겉옷을 챙겨나가야 할 정도로 기온이 떨어져 여기저기서 기침 소리도 많이 들린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고, 역시나 감기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약을 처방받았으니 더 이상 심해지지 않겠지, 그런데 혹시 갑자기 열이라도 나면 또 연가를 써야겠네, 연가는 며칠이 남았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나와 달리 병원 간호사가 준 비타민 하나에 신난 아이들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우리 아이만 아픈 것도 아니고, 환절기에 감기 걸리는 게 엄청나게 큰일도 아닌데 그럼에도 늘 반복되는 이런 상황들이 때때로 지나치게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머리와 마음이 차라리 텅 비어있었다면 나를 뭉개지 못해 안달 난 삶의 무게를 어떻게든 버텼을 텐데, 이미 분변의 냄새보다도 지독한 삶의 찌든 내로 가득 찬 가슴속에 아이들과 함께 들어선 약국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약 냄새까지 섞이자 진짜 모든 걸 토해내고 싶었다.

그때, 바로 그녀가 떠올랐다. 한때는 같은 근무지에 일해서 매일매일 얼굴을 봤고, 가끔 같이 야근도 했고, 지친 하루를 끝내고 일터 밖으로 나와 진한 향의 커피를 함께 마셨던 그녀. 사회에서 맺는 인간관계가 다 그렇듯이 서로의 자리가 바뀌자 당연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잊을만하면 연락해서 얼굴을 마주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라고 하기에는 어정쩡한 관계의 그녀가 그 순간에 왜 생각이 났을까. 아마 그녀 특유의 긍정에너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이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육아의 고충을 털어놓을 때마다 우리 아이의 변호사인 것처럼 아이는 당연히 그런 거다, 아이를 믿어라, 아주 잘 크고 있다며 말해주곤 했다. 다른 얘기를 할 때 보다 더 확신의 찬 얼굴로, 꼭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줬기에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확언은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보다 헤어지고 나서 며칠이 흐른 후에야 진한 여운으로 슬그머니 내 마음에 떠오르곤 했다. 특히 내 아이를 향한 어떤 부정적인 평가나 말들이 들려올 때, 아이의 돌발행동으로 너무 황당해서 열이 뻗쳐오를 때는 미친 듯이 솟는 화를 잠재우는 소화제 같은 역할도 해주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한번 가라앉은 마음이 영 올라오지 않아서 해맑게 방방 뛰던 아이들이 약국을 나와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아주 잘 크고 있다는 말. 우리 아이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 괜찮다는 말.

그래서 문득 생각해 보니 그녀를 만난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래간만에 연락이나 해볼까, 싶다가 가만히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 지내고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녀와 나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뜬금없이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놓겠지만, 그 전에 서서히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지치고 얼룩진 내 마음부터 잘 말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괜찮다는 말은 해줄 수 있다. 하지만 한결같이 괜찮다 해주었던 사람에게서 들으면 그 선한 영향력은 무척이나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괜찮다.”라는 말이 간절한 요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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