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초기 4 - 벌초
예초기 4 - 벌초
  •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 소장
  • 승인 2023.09.17 17: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복을 여는 창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 소장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 소장

 

고향의 가을 산하는 예초기 소리로 귀가 따갑다. 오전은 도로 옆 잡풀을 제거하는 소리로, 오후에는 벌초하는 소리가 온 마을에 가득하다. 친척 조카 동선이가 운영하는 백곡 철물점에도 예초기 수리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벌초를 위한 사전 준비다. 예초기를 오래 사용하면 시동이 안 걸리거나 엔진이 불규칙하게 돌거나, 잘 돌다가 시동이 꺼지는 등 여러 증상이 나타난다. 우리 집 예초기도 3년 동안은 문제없이 잘 사용했는데, 올해는 자꾸 시동이 꺼져 수리를 받았다. 예초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밸브를 잠그고, 시동이 자동으로 꺼질 때까지 엔진을 돌려 남은 휘발유를 모두 태워 버려야 한다. 아울러 카뷰레터에 남아 있는 휘발유도 모두 빼줘야 한다. 이 두 가지만 잘 지키면 예초기를 오래도록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 집 가족묘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선산에 있다. 아주 어릴 적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결혼 후까지 함께 사신 할머니를 합장한 묘와 아버지 어머니를 같이 모신 묘가 있다. 땅이 좋아 배수가 잘되고,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하며, 사방이 트여 있어서 아주 좋은 자리라고 한다. 동네 어르신들은 묘를 잘 써서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하신다. 가족들이 모두 무탈하게 잘 살고, 집안에 세계적인 유명 인물도 태어난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벌초를 대신 해주는 분들에게 부탁했다. 고향으로 돌아오고 시골 생활도 잘 적응했다. 예초기 사용법도 익힌 올해는 형제가 직접 벌초 하기로 했다. 서울 사는 동생과 9월 16일 토요일로 날짜를 잡았다. 처음에는 날씨가 좋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목요일부터 비가 내렸다. 전날에는 제법 많은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까지 요란했다. 다른 날짜를 잡기가 어려워 비가 오더라도 강행하기로 했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도 계속됐다. 새벽에 떠난 동생 부부가 7시 20분경에 도착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예초기, 휘발유, 모자, 물, 낫, 갈퀴 등을 챙겨 9시에 집에서 나왔다. 산소 오르는 길에 나무가 무성히 자라나 예초기로 짧게 자르며 길을 내고 올라갔다.

산소에 도착하니 신기하게도 내리던 비가 그쳤다. 잡풀과 잡목이 산소와 주변에 가득했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벌집이 없는지 확인하고 예초기 시동을 걸었다. 나는 예초기 작업을 동생은 낫으로 잔 나무 정리와 갈퀴 작업을 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이 정리되고 묘가 깨끗해졌다. 해님도 나타나고 바람도 시원하여 벌초하기에는 가장 좋은 날씨였다. 예초기 휘발유 통을 세 번 비우고 작업이 끝났다. 한두 시간 지난 줄 알았더니 벌써 네 시간이 지났다. 안젤라와 제수씨가 도착해 함께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가져간 도구를 챙기고 산에서 내려와 차에 타니 비가 다시 내린다. 벌초하는 자식들을 위한 부모님의 사랑이 보여준 기적 같은 날씨였다.

부모의 사랑은 하늘나라와 지상의 경계를 초월한다. 평생 보살피고 돌보신 사랑도 부족해 하늘의 날씨마저 움직여 자식의 안위를 지킨다. 나와 동생이 흘린 땀방울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하루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