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딛고
죽음을 딛고
  •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09.10 17: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캄캄한 새벽, 발끝부터 서늘한 기운이 들어 눈을 떴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는 어디로 가고 너무 더워 열어놓은 베란다 문으로 꽤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우리 아이들의 몸에 바람이 들어 감기가 들까 서둘러 문을 닫고 보니 가로등만 덩그러니 켜져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가을이 왔구나, 싶었다.

어느덧 9월도 중순을 향해 가고 있다. 입추가 오고 처서가 왔다는데 때에 맞춰 찾아오는 절기가 무색하게 지구를 뜨겁게 달구는 해를 보며, 한때는 정말 가을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원한 아침 공기로, 서늘한 새벽공기로 가을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멈춰 있지 않는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 사회를 들끓게 만드는 이슈들도 적절한 출구를 찾아 조금씩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더 이상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도 없고, 불특정 다수라는 비뚤어진 방향으로 표출되는 분노도 사그라들고, 특정인을 향한 비상식적인 저격도 사라진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로 삽시간에 퍼지고 있는 불안도 조금씩 자취를 감출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 모든 바람이 꿈처럼 깨지는 사건이 결국에 우리 지역에서도 벌어지고 말았다.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수사를 시작한다고 밝혔지만, 여론은 이미 극성민원이나 혹은 학교폭력과 같은 업무상 이유로 선생님이 자살한 것처럼 몰이하고 있다. 고인에 대한 진심 어린 추모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리고 그분의 유족과 지인들의 슬픔이 쏟아지기도 전에 각종 근거 없는 추측들이 먼저 소란을 떠는 것 같아 마음이 한없이 씁쓸했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는 변화를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제물처럼 바치게 되었을까. 나 또한 선생님은 아니지만 교육현장에 있기에 그동안 잊을만하면 “교권 추락”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들어왔지만, 이번 서이초 선생님 자살 사건을 통해 밝혀진 선생님들이 그동안 겪어왔던 여러 부당한 상황들을 살펴보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민원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분명 누군가는 개선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었을 텐데 세상이 받아주지 않았던 그 외침이 끝내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한폭탄이 터지듯 여론화가 되고 국민적 지지를 받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착잡하다.

그런데 더 서글픈 건, 이제 기회가 왔으니 반드시 교권을 회복시켜 돌아가신 선생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자며 한목소리를 내는 이들과는 다르게 여러 이유로 돌아가신 선생님과 같은 선택을 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현실이다.

누군가 그랬다. 대한민국의 안전은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딛고 세워진다고. 여기서 “안전”은 물론 건물이 무너지거나, 테러가 발생하거나 하는 등의 국가적 재난을 뜻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상황 말고 아주 기본적인 안전, 즉 내가 소명을 갖고 일을 하면서 내 정신과 육체에 어떤 피해를 볼까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안전 또한 포함된 듯이 느껴진다. 그 기본적인 안전을 위해 계속 허망한 죽음이 전파를 타고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비단 교권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든 굳이 죽지 않아도 간절하게 억울함을 토로하면 한 명이라도 귀 기울여 줄 수 있는 그런 사회적 움직임이 절실하다. 그래야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누군가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서러움으로 점철된 타인의 유서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