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성당의 신앙 역사
백곡성당의 신앙 역사
  •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
  • 승인 2023.09.0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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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여는 창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

 

고향으로 돌아온 2019년 8월 `백곡 공소'가 `백곡 본당'으로 승격합니다. `공소'는 주임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교회로 미사가 집전되지 않습니다. `본당'으로 승격되면 주임 신부가 파견되어 미사와 성사가 집전되는 완전한 성당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매우 뜻깊고 감동적인 일입니다. 고향살이 4년 차에 백곡 신앙 선조의 삶을 알고 싶었습니다. 옛 기억을 간직한 성당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역사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성당 어르신들을 인터뷰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백곡에는 180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모여듭니다. 백곡은 깊은 산간 지대로 사람의 발길이 드문 천혜의 요새입니다. 여러 지역을 떠돌던 신자들이 모여 비밀 교우촌을 만들고 신앙을 지킵니다. 1837년 이전에 양백리 배티 교우촌이, 1851년 이전에 용덕리 용진골 교우촌이 만들어집니다.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명암리 발레기 교우촌, 장소는 특정할 수 없지만 동골 교우촌이 만들어져 백곡 천주교 신앙의 뿌리가 됩니다. 이중 배티는 가장 대표적인 교우촌입니다. 배티 교우촌에는 `조선 대목구 최초의 신학교'가 설립되고 다블뤼 신부, 최양업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거주하며 신자들을 보살피고 복음을 전하는 충북 최초의 `본당'이 됩니다. 배티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이어집니다. 박해 시기 백곡에는 많은 순교자가 탄생합니다. 이중 명암리 발레기의 김원중 스테파노, 배티의 장 토마스, 송 베네딕토, 송 베드로, 이 안나, 용진골의 박경진 프란치스코, 오 마르가리타는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에 의해 `복자'로 시복됩니다.

박해 시대가 끝나고 1887년부터 백곡에는 교우촌을 중심으로 공소가 신설됩니다. 배티 공소, 용진골 공소, 삼박골 공소, 은골 공소, 모니 공소, 지구머리 공소가 차례로 만들어집니다. 공소는 서로 분리·통합되다가 마지막에는 배티와 용진골 공소만 남습니다. 백곡 공소를 관할하는 본당은 1890년 간양골 본당(예산), 1895년 공세리 본당(아산), 1900년에는 안성 본당으로 바뀝니다. 1956년 4월 30일 진천 본당이 설립되면서 백곡면은 비로소 진천 본당 관할이 됩니다.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용진 공소가 지새울로 이사하고 1962년에 옛 백곡 우체국 자리에 백곡 공소로 자리 잡습니다. 1963년에는 現 성당 자리로 공소가 옮겨집니다. 1974년에 유서 깊은 배티 공소가 폐쇄되어 백곡 공소로 통합합니다. 1977년에는 병인박해에 순교한 밀양박씨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씨 바르바라 묘를 배티 무명 순교자 묘역에서 공소로 이장하여 순교자 묘가 있는 전국 유일의 공소가 됩니다. 2018년 11월 20일에는 공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봉헌합니다. 2019년 8월 16일에 진천 본당 관할 `백곡 공소'에서` 백곡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신설되어 새로운 본당 시대를 맞이합니다. 2019년 12월 6일에 오반지 바오로의 유해 일부를 본당에 모십니다.

백곡 성당은 박해 시기 교우촌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의 뿌리와 순교 신앙의 유산 위에 세워진 성당입니다. 백곡 성당은 신앙 선조의 삶을 본받아 `이웃 사랑과 복음의 등불'을 환하게 밝히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더 튼튼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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