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재일조선인 대학살과 `가네코 후미코'
`관동대지진' 재일조선인 대학살과 `가네코 후미코'
  • 이재룡 고인돌 대표
  • 승인 2023.08.3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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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재정 수필가
이재룡 고인돌 대표

 

9월1일 일본 관동대지진 재일조선인 대학살이 100년을 맞는다. 뼈아픈 진실이 한국인의 심장에 영원히 담길 것이라 믿는다.

최근 저녁 시간에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심도 있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한낱 일본인에 불과한 여자 한 사람을 가지고 왠 그리도 호들갑을 떠냐고 반문할는지 모르나 심히 우매하다. 각종 매체나 소셜네트워크(sns)를 검색이라도 해보면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가네코 후미코의 태생, 생애 등 기초적인 사실 관계는 올해 5월2일자 `충청타임즈' 1면 기사에 나타난다.

영화 `박열'로 제작된 독립운동가 박열의 부인이자 청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가 독립기념관으로부터 올해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를 받다가 9세때 충북 청주군 부강면(현 세종시 부강면) 고모부 집으로 보내져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세종시 부강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서도 천대와 무관심 속에 자란 가네코 후미코는 1919년 3월 청주군의 3·1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인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일본으로 귀국 후 1922년 독립운동가이자 남편인 박열과 만났으며 흑우회, 불령사 등의 아나키스트 단체에 참여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 등을 발표했다.

특히 1926년 2월26일 대심원 1차 공판에서 박열과 함께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등 법정투쟁을 전개했으며 같은 해 3월2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특히 그녀는 공판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일제는 회유목적으로 형을 줄이는 은사령을 내렸지만 그녀는 문서를 찢어버리는 방식으로 저항했고 1926년 7월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정부는 그녀의 공훈을 기려 2018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간토지방에 진도 7.9 지진이 엄습했다. `관동대지진'이다. 일본인들은 대혼란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해 성난 민심을 수수하고자 정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유언비어를 생성ㆍ유포하고 조선인들을 칼과 죽창으로 살해하거나 여러 명을 산 채로 묶어 수장시키거나 기름을 부어 불에 태워 죽였다. 무려 6661명이나 되는 우리 조상이 무자비하게 학살됐다.

최근 이러한 내용을 기반으로 일본에서는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영화 제작이 준비되고 있다. 9월 1일과 2일,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과 가네코 후미코 관련 영화제작자 등이 세종시 부강면을 방문해 가네코 후미코가 살았던 현지를 탐방하고 관련자들을 만나기로 했다.

일본에서 부강을 찾는 참가자는 모두 8명이다. 발표자는 △가메다 히로시 △구리하라 야스시 두 명이다. `가메다'는 오래전부터 연구소를 드나들던 분이며, `구리하라'는 정치학자이자 아나키즘 운동가로 가네코 후미코와 관련된 많은 책을 낸 분이기도 하다. 이외에 △중앙공론사 △사진작가 △영화감독 △극작가 △교도통신 북경특파원 △교도통신 평양특파원도 함께 참가한다. 일정은 1일 차 가네코 후미코 묘소 참배와 학술회의 참석, 2일 차 세종시 부강을 방문한다. 부강에서는 가네코 후미코의 흔적을 찾아 발품을 팔던 이규상 전 부강면장, 백원기 문화유산한옥 대표 단 둘이서 8명의 안내를 도맡아 진행한다.

세종시가 발 벗고 나서도 시원찮을 일을 민간이 두 명이 팔을 걷어붙였다는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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