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징악이라는 하얀 거짓말
권선징악이라는 하얀 거짓말
  •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08.2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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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평소와 다름 없이 아이들과 놀이터로 향한 날이었다. 한참을 놀다가 너무 더워 둘째 아이와 놀이터에 있는 정자에 앉아있는데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학생의 손에는 머랭 쿠키가 담긴 귀여운 플라스틱 컵이 쥐어져 있었고, 남학생은 자신이 선물로 받았는데 너무 달아서 못 먹겠다며 혹시 아이가 좋아하면 드시겠느냐고 물었다. 아이 얼굴을 보니 먹고 싶은 기색이 역력해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쿠키를 받아 아이에게 건넸다. 그런데 아이가 쿠키를 입게 가져가려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재빨리 쿠키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문득 몇 달 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학교 앞 마약 음료 유포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쿠키를 건넨 남학생은 놀이터를 떠난 후였다.

이렇듯 요새 마음속에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원초적인 불안감이 나의 일상생활을 서서히 잠식해 나가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느껴지는 불안감이 아닌 말 그대로 내 삶과 목숨이 강하게 위협받는 듯한 본능적인 불안감이다.

대한민국은 어쩌다가 이렇게 불안한 나라가 되었을까. 불과 십몇 년 전만 해도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면 대부분 상점이 문을 닫고 어두컴컴해지는 외국과는 달리 밤 10시든 12시든 안전하게 자신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치안 강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말이다. 그런데 이 불안감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양분을 먹고 계속해서 무럭무럭 자라는 현실이 절망감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이미 피해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너질 대로 무너졌는데, 피의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감형받고 그것도 모자라 보석금을 내고 나오거나 모범수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가석방이 되기도 한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것일까. 게다가 더 참을 수 없는 건 어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도 여론을 통해 공론화가 되지 않으면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사회의 모습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절망적이다.

이러한 절망은 아이들을 바라볼 때 더 선명해진다. 하루는 아이에게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유명한 명작동화를 읽어준 적이 있다. 평소 같으면 아이에게 “나쁜 행동 하면 나중에 벌 받아.”라고 말해주었을 텐데, 이런저런 흉악한 사건의 가해자들이 엄청난 돈을 들여 대형 로펌 변호사를 선임해서 형이 생각보다 적게 나올 것 같다는 예측 기사를 본 후여서 그런지, 차마 입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하얀 거짓말이 되어버린 권선징악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각자도생(각자가 스스로 제 살길을 찾는다.)'를 가르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나 하는 씁쓸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희망한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 많이 남은 우리와 이제 겨우 삶이라는 긴 여정의 출발선을 넘어가려는 어린 생명을 위해 이 나라에서 모든 범죄를 막아줄 수 없다면 최소한 범죄에 걸맞은 벌이라도 내려줄 수 있기를.

이제 남은 최소한의 방어선은 그것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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