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를 가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를 가라
  •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 승인 2023.08.23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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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정호승 시인의 시 <선암사>의 구절이다. 눈물이 났느냐. 아니었다. 기차를 타고 갔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일전에 조계산(曹溪山) 고개 너머 송광사(松廣寺)만 다녀갔던 것이 못내 아쉬워 언젠가는 꼭 오겠노라 다짐한 걸음이었다.

순천 선암사(仙巖寺)를 찾은 때는 가을채비 할 기미도 없던 산색 푸른 지난해 여름이었다.

큰비 그쳐 요란한 개울 옆길을 따라 걷다보니 승선교(昇仙橋)가 보인다. 무지개모양 아치형의 돌다리다. 한국인이라면 사진으로라도 한번쯤 봤을법한 다리다. 절집에 자리한 때묻고 한(恨)묻은 것들이 그러하듯 승선교에도 전설이 있다. 전설이든 정설이든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때는 조선 숙종 24년 주인공은 호암대사(護巖大師)다. 대사는 관음보살의 시현(示現)을 바라며 백일기도를 드렸으나 관음보살의 옷깃은커녕 실오라기도 보지 못했다. 헛된 기도라고 낙심한 대사가 벼랑 끝에 몸을 던져 떨어지려는 찰나에 한 여인이 나타나 그를 구하고는 사라진다. 대사는 자신을 구한 그 여인이 관음보살이라 믿고 원통전(圓通殿)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고 절 입구에 다리를 지었다는 이야기다.

수능기도도 기본 100일인 요즘시대의 시선으로는 대사는 참 급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관음보살의 시현(示現) 이후에 진정한 불심을 얻었을까. 그랬다면 말이 된다. 그가 지었다는 승선교는 비춰진 성격과는 다르게 섬세하고 정교하다. 지금은 세월도 세월인지라 자연과 어우러지다 못해 그대로 그렇게 자연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그리고 배운다. 무엇하나 기댈 것 없는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내내 무너지지 않은 돌들이 보여주는 묵언의 가르침. 믿으면 기대고 기댔으면 믿으라고.

창건(創建)과 전소(全燒)와 중수(重修)와 중창(重創)과 재중창(再重創)은 뼈 시린 역사를 간직한 한반도 절집들의 공통된 수난사(受難史)다. 물론 선암사도 그랬다. 임진년과 정유년에는 왜놈들이 태웠고 경인년 전쟁통에 탔다. 지으면 태웠고 타서 또 지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전각 9동을 비롯한 총 65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20여동만 남았다. 정호승 시인의 시 때문이었을까. 짧다면 짧고 깊다면 깊은 역사를 지닌 당우(堂宇)들 중 유명하기로는 단연 해우소다. 선암사 해우소는 앞면 6칸 옆면 4칸에 측면은 풍판으로 가려진 맞배지붕에 기와 올려진 2층 목조건물이다. 입구 정면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건물 뒤편에서 보면 2층임을 알 수 있다. 2층이라 높은 만큼 깊이도 깊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920년 전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뒷간의 깊이만큼 뒷간의 역사도 얕지는 않다. 곡선미를 살린 입구를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 칸이 구분 지어있다. 규모와 구조 모두 보기 드문 고풍스런 재래식 뒷간이다. 물론 지금도 사용가능한 화장실이다. 그런데 시인은 하필 왜 여기에 가서 울으라 했는가.

배설물은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생존증명이다. 살아있으면 어쨌거나 먹어야하고 먹었으니 싸야한다. 잘난 놈도 못난 놈도 먹었으면 언젠가는 싼다. 삶은 채움과 비움의 연속이다. 깨우쳤을 리도 배운 바도 없는 뱃속 오장육부는 이것을 숨이 붙어있는 한 쉬지 않는다. 뒷간은 살아있는 것들의 명징한 존재의 표식더미 위에 널빤지다. 그런 의미에서 뒷간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해우소에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 그곳에서 감정의 배설물인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마음 또한 살았다는 것. 이것이 시에 대한 내 나름의 주제 넘는 해석이다.

가을 눈물이 나면 선암사를 가라. 울려거든 가서 울고 울려거든 실컷 울어라.

살아있느니 슬픈 거다. 살아보려니 슬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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