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인플루언서 송시열
조선의 인플루언서 송시열
  • 김도연 충북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 승인 2023.08.2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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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문화유산 이야기
김도연 충북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김도연 충북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사람이다. 위대한 사상, 역사를 바꾼 발명품도 사람을 통해 탄생하였고,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의 흐름에 특정 인물들이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누가 있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면 비교적 사료의 양이 풍부한 조선시대로 한정해보자. 세종대왕을 비롯한 역대 왕들도 있을 것이고, 구국의 영웅 이순신도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여기에 더해 우암 송시열을 선정하고 싶다.

송시열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출신으로 아버지는 강릉참봉을 지낸 송갑조, 어머니 선산곽씨는 임진왜란 때 조헌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 곽자방의 딸이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행적이 매우 드라마틱한데, 예송논쟁이나 환국 등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송시열이 있었다. 인물에 대한 평가도 양극단을 달리고 점도 흥미롭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문화유산을 통해서도 그의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충북 괴산군에 가면 사적으로 지정된 `괴산 송시열 유적'이 있다. 이곳에는 화양서원과 송시열 묘역 등이 위치한다. 이 가운데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1696년 숙종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1870년(고종 7)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 가장 위세가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화양서원에서 인접한 곳에는 `괴산 화양구곡'이 있다. 이곳은 송시열이 말년에 거주한 곳으로 그의 제자들이 설정한 구곡인데, 지금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의 신념을 상징하는 문구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고, 송시열을 숭모하거나 학연이 있는 사람들이 화양구곡을 성지로 순례하며 자기의 관직과 이름을 새겨놓은 것도 많다. 가히 조선시대 핫플레이스였던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송시열의 영향력은 그의 저서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송시열의 저서와 시문, 상소 등을 모은 모음집인데, 표제(책의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여기의 `송자(宋子)'에서 `자(子)'라는 보통 공자, 맹자 등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위대한 사람들에게 붙는 글자인데,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칭했으니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책은 1795년(정조 20년) 정조의 왕명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8편의 어제(御製) 묘비명과 제문, 그리고 어필(御筆)의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대전의 우암사적공원에는 `송자대전'의 목판이 있는데, 총 11,023판으로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송시열의 초상화 4점은 국보, 보물, 시도 지정문화재로 각각 지정되었고, 우암 송시열이 효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초구(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옷) 또한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그가 있던 곳, 그가 쓴 책, 그의 초상, 그의 옷까지 많은 것들이 송시열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가 되었다. 더욱이 여기에 소개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더 많은 문화재가 있다. 이처럼 지금 남겨진 문화재만으로도 송시열의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의 인플루언서라는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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