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
외가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 회장
  • 승인 2023.08.1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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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 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 회장

 

분홍색 가방이 화사하다. 작은 트렁크 안에는 겉옷과 속옷, 몇 개의 장난감, 그리고 수영복이 들어있다.

초등학교 1학년 외손녀가 방학하면서 외가에서 며칠 자고 간다며 가져온 물품들이다.

어른만 있는 집에는 아이가 원하는 먹거리도 부족하고 놀거리도 없다.

텔레비전에서 어린이 프로를 시청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할머니와의 놀이도 심드렁하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물을 채워놓고 물장구를 쳐도 혼자라서 심심하다. 눈치를 보다 아이와 함께 마트로 갔다. 원하는 것을 잔뜩 사서 풀어놔도 전혀 신나 보이지 않는다.

산속 마을에는 초등학생뿐 아니라 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생도 없다. 집마다 어른들만 산다.

숨 막히게 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종일 사람 구경하기도 어렵다. 따분한 아이에게 텃밭의 옥수수를 따다 쪄 주고 토마토를 갈아 주스 만들어 먹이느라 정성을 다해도 성이 차지 않는가 보다.

세상이 변하고 먹거리 놀거리가 변했는데 반가울 리 없다. 아이가 여러 명이라면 서로 경쟁하듯 먹겠지만 혼자라서 욕심낼 일도 없다.

결국, 한나절 만에 제 어미에게 전화하더니 점심과 저녁, 두 끼만 먹고 갔다.

제 아빠가 데리러 왔을 때는 미련이 있는지 할머니와 그냥 있겠다고 하더니 아쉬움만 남기고 따라간다.

허전하고 속상한 마음을 하소연하려고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방학만 되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손주들이 와서 일주일을 지내다 돌아가면 여름이 다 지나가는 것 같다고 한다.

더우면 냉방기 켜고 먹거리는 마트에 가면 지천이다. 저희끼리 잘 놀아도 먹이고 빨래해 입히자면 내 손주들만 와서 북적여도 힘들다고 오히려 하소연이다.

나는 힘은 들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복 터지는 투정이라고 했다.

옹기종기한 마을의 고샅길을 지나면 갓 쪄낸 옥수수 냄새가 먼저 풍겨왔었다.

외가는 식구가 많았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내외, 다섯 명의 사촌과 막내 이모가 함께 살았다.

안방에는 할머니와 이모, 사촌들이 함께 자고 윗방은 외삼촌 내외가 썼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라 오는 것도 별로 반갑지 않았을 것인데 엄마는 나를 방학만 하면 외가로 보냈다.

처음엔 방학이 끝나는 며칠 앞두고 오기도 했고 고학년이 되면서 동생들이 합세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입식 주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끼니때마다 물을 길어오고 불을 지펴서 밥을 해야 한다.

게다가 딱히 갈 곳이 없던 이종사촌들까지 모이다 보니 외갓집의 두레 밥상은 늘 비좁았다.

식구도 많은데 시누이 자식들까지 와서 법석여도 외숙모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외삼촌이 부엌에서 고생하는 외숙모에게 미안했던지 가끔 우리에게 눈치를 주곤 했으나 그때는 힘들었을 외숙모의 고충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고 엄마 같은 이모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외할머니가 계셨기에 내 집보다도 만만한 집으로 여겼다.

외가에 대한 따듯한 기억은 끊임없이 재생된다.

삶을 정서적으로 안정시켜 주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위대한 다리다. 외손녀에게 대물림해도 좋을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외삼촌도 없고 사촌도 없다.

우리 동네에는 외손녀 또래의 아이도 없다.

주변 환경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 방학을 외가에서 보내며 할머니와 함께 자고 놀고 싶었던 아이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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