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내 나이 되어 봐
너도 내 나이 되어 봐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3.08.08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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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그러고 보니 유성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구성지게 하던 작은아버지 가신지도 까마득하다.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네모네 꽃잎 어쩌고 하는 노래도 떠오르고 동네에서 우리 집에만 있었던 나팔꽃 닮은 유성기가 자랑스러웠던 기억도 난다. 먹을 것도 놀 것도 없는 시절의 유성기는 아주 드문 대단한 신식 문물이었다.

요즘 집집이 있는 온갖 전자제품을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만큼이나 격세지감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지만.

고딕 양식의 창문 같은 것이 주르륵 달린 진공관을 품은 라디오는 찌지직 찌지직 잡음이 심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일본 천왕이 항복문서 낭독하는 소리를 들려주던 라디오라나? 골동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을 것인데, 그걸 어쨌을까? 유성기는 또 어떻게 사라졌지?

누런 공책 찢은 조각에 한창 유행하던 노래를 적어달라던 작은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앉아서 간드러지게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네 마음> 눈물 훔치던 작은어머니랑 그 시절의 이웃들, 다 어디로 갔을까?

또 얼마의 세월을 버린 후였던가? 남편 월급 몇 달 치를 모아 모아 장만한 흑백 티브이, 장만하자마자 금세 총천연색 스팩타클한 컬러텔레비전이 유행해서 어깨 힘 다 빠지게 하고 뱁새의 서러움을 실감케 하던 기억, 가방처럼 들고 다녔던 트랜지스터, 밤을 꼬박 지새우며 듣던 별 밤의 노래들.

그것뿐이랴, 한때 전화가 재산인 적도 있었다, 이제는 코흘리개 꼬맹이까지 핸드폰을 지니고 다니지만 큰 동네에 한 대나 있을까 말까 한 귀한 전화기….

이야기하다가 스스로 씁쓸해진다. 나는 아날로그 세대? 아니 그 이전의 세대가 맞는 말일 것이다. 때마다 부품을 갈아 끼우듯 점점 반짝거리고 반들반들해지는 세상, 내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만든 긴 시간 동안 세상은 화살 한 촉 지나간 듯싶고 빠르게 달라졌다. 달리다 달리다 가속도가 붙어 우리 세대는 80K 속력이라나 뭐라나. 그간 부품을 갈아 끼운다든지 병원을 자주 들락거리는 A/S 덕에 그런대로 고무줄처럼 늘어난 것이 수명이지 싶다.

어린 손자는 손가락이 연체동물을 닮았는지 피아노며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도 나에게 한숨 섞인 감탄이 터져 나오게 하더니 이제는 핸드폰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다.

어린 것이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매끄럽게 자판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은 이미 그들의 것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메시지 하나 보내는 데도 손끝이 둔해서 여러 번 고쳐 쓰는 일이 늘어만 간다. 그래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문화원에 가서 컴퓨터를 배우고 핸드폰 사용법도 배우면서 용을 쓰는 중이다.

집게손가락만으로 꾸욱 꾹 자판을 눌러가며 기를 써 봐도 얼마 되지 않아 길을 잃어버려 되돌아 나오는 나는 자주 10살짜리 손자를 불러댄다. 좀 전에도 가르쳐 줬는데 또 잃어버렸느냐고 퉁생이하는 손자가 야속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나이 되어 보라지. 산에 가지 않은 것만도 어딘데” 열심히 애쓰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래, 내 나이 되어 봐.

요즘 세상은 미처 스캔이 끝나기 전 화면이 바뀌듯 빠르게 변하고 있다. 디지털시대라더니 MZ세대, 인공지능이네 챗봇이네 드론이네, 낯선 언어들이 범람하는 속에 내가 사는 것이다.

“요즘 수박은 달아도 너무 달아” 탓할 것이 마땅치 않은 터에 방바닥에 주저앉아 우둑우둑 깨물어 먹는 수박 맛을 탓하고 나선다. 이미 우리 세대는 저만큼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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