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여름날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3.08.0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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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이면 사람들은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힘든 시간은 더디게 지나가기 마련이다.

세월이 빨리 가는 것을 한탄하는 인간들로서는 다소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힘든 시간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무더위는 참기 어렵지만, 그것이 주는 매력도 있게 마련이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규보(李奎報)는 무더운 여름이 주는 매력을 찾는 방법으로 수월한 여름나기를 할 수 있었다.


여름날(夏日卽事)

輕衫小簟臥風欞 (경삼소점와풍령) 홑적삼에 대자리 깔고 바람 창가에 누웠더니
夢斷啼鶯三兩聲 (몽단제앵삼량성) 꾀꼬리 울음 두세 자락이 꿈길을 끊어놓네
密葉翳花春後在 (밀엽예화춘후재) 잎사귀에 가린 꽃은 봄 뒤로도 남아있고
薄雲漏日雨中明 (박운루일우중명) 얇은 구름에 스며든 해가 빗속에도 환하네

시인은 무더위를 잘 지나가기 위해, 여름에 최적화된 소재의 옷과 자리를 마련하였다.

삼베로 만든 홑적삼 그리고 대나무로 만든 자리가 그것이다. 시원한 옷을 입고 시원한 자리에 누우니 잠이 절로 든다.

무더위를 잠으로 보내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인데 잠을 자다 꾸게 된 꿈속에서 꾀꼬리 노래를 듣다니 금상첨화도 이런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 소리에 잠을 깼지만 기분 좋은 여운이 한동안 뇌리에 머문다.

기분 좋은 여름 낮잠에 흥이 오른 시인의 눈에 비친 여름 풍광은 결코 무더위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빽빽한 잎사귀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던 꽃들도 눈에 띄고 얇은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비가 오는 가운데도 밝게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 무더위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만, 그것을 즐기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의 대상이기도 하다.

무더위에 입으려고 장만해 놓은 옷과 자리가 있는 사람은 무더위를 되레 기다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더위가 반갑게 인식되면 무더위가 만든 풍광들이 아름답게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무더위를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무더위와 친해지는 것이리라.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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