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느실, 외갓집 가는 길
흐느실, 외갓집 가는 길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3.07.2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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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해가 서산에 닿으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한다. 거의 다 와 간다. 이리도 쉽게 오는 것을 그동안 왜 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보고 싶던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이런 모습을 보기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흐느실은 나의 외갓집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방학이 되면 으레 외갓집에서 여름과 겨울동안 여러 날을 보내곤 했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터라 원남면 보천읍까지만 버스가 다녔다. 보천에서부터 장갈의 흐느실까지는 걸어서 가야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한 시간은 족히 넘는 길이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도 엄마의 손을 잡고 그 먼 길을 걸었다. 나는 엄마를 따라 처음에는 곧잘 걸었지만, 동네도 보이지 않는 길을 하염없이 걷다보면 어김없이 힘들다 떼를 썼다. 그러면 엄마는 나를 업고 가시곤 했다.

그나마 장갈까지는 차는 다니지 않았지만 길은 제법 넓었다. 하지만 장갈을 지나 흐느실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면 길도 좁거니와 큰 내도 건너야 했다.

가문 날에는 그래도 돌다리가 있어 건너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비가 온 뒤에는 무릎까지 차오른 냇물을 헤치고 건너야 해서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머리에는 봇짐을 이고, 치마도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시곤 나까지 등에 업고 건너셨다. 그렇게 내를 지나면 좁은 산길이 시작되었다. 산길은 좁았지만 길옆으로 제법 넓은 내가 흘러 심심하지 않았다. 한쪽은 시내물이, 또 다른 쪽은 기암절벽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친정가시는 길이니 즐거우셔야 했을 텐데도 얼굴이 어두웠다는 생각이 난다. 애옥한 살림이었으니 친정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을 테다.

엄마의 친정인 외갓집은 흐느실 동네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었다. 행랑채가 딸린 기와지붕의 멋스러운 제법 부유한 집이었다.

흐느실의 넓은 시냇물은 여간 맑고 찬 게 아니었다. 여름 한 낮에는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멱을 감았고,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면 동네 아낙들이 몸을 씻곤 했다.

흐느실의 개울은 겨울이면 아이들을 달뜨게 만들었다. 그 넓은 개울은 얼음썰매를 지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외삼촌은 자식뿐 아니라 손자들에게 한없이 인자한 분이셨다. 얼음썰매도 정말 잘 만드셨다. 당신의 손자들 뿐 아니라 내 것도 잊지 않고 만들어 주셨다. 얼음썰매를 지치다 보면 하루해가 어찌 지는 줄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개구쟁이 녀석이 나에게 얼음덩이를 던지는 바람에 머리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뒤로는 얼음썰매를 타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게 멋진 흐느실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쯤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동네가 모두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흐느실이 물속에 잠긴지가 벌써 40년이다.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곳을 잊지 못하셨다. 비린 것은 입에도 대지 않던 분이었지만 오로지 흐느실에서만 나는 `베틀 올갱이'는 잘도 드셨다. 엄마가 살아 계시던 어느 해에 큰 오빠는 엄마를 모시고 흐느실 가까운 세고개 계곡에서 `베틀올갱이'를 잡아다 끓여 드렸다 했다. 엄마는 아마도 허우룩한 마음을 고향의 맛으로 채우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새 해는 세고개 산에 올라앉아 위세가 등등하다. 흐느실과 세고개를 이어주는 긴 다리에 섰다. 어딜 보아도 낯선 풍경이다. 아름답게 빛나던 냇가도, 외갓집도 더 이상 이곳에는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지우고, 또 다른 것을 창조해 가는 것이 세월이란 말인가. 그러니 추억이란 영원히 아름다운 신기루로 남을 수밖에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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