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부쟁이 둘레길
쑥부쟁이 둘레길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3.07.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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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용산저수지 둘레 길을 걷는다. 저수지를 감싸 안은 듯 포근하게 둘러싼 오른쪽의 산을 올려다본다. 소슬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다. 두어 바퀴 돌고 숨을 고르느라 나무 의자에 앉는다. 물속에는 길을 잃은 듯 달이 희미하게 잠겨있다.

건너편 휘돌아 간 산자락 데크 위에 노부부가 걷고 있다. 불편한 다리를 절룩이는 할머니의 손을 할아버지가 잡아주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며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걷는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눈을 떼지 못하는데 코끝이 찡해 온다.

나도 작년 가을에는 남편과 이 길을 자주 걸었다. 쑥부쟁이 꽃이 지천으로 핀 둘레 길에서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의지하며 피어나는 쑥부쟁이처럼 우리도 서로의 마음을 살폈다.

흔들리는 그 꽃이 피기까지 척박한 땅에서 계절마다 가뭄과 추위를 견디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꽃, 뿌리는 땅속으로 뻗어 이웃과 손을 맞잡았고 위험이 닥쳐도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주변의 다른 식물이 침범할 수 없을 만큼 무리 지어 울타리를 만들고 서로를 보듬었다. 우리에게 보랏빛 밝은 꽃은 희망이고 사랑이었다.

쑥부쟁이만큼이나 강인한 정신을 가졌던 남편은 예고 없이 찾아든 병마와 긴 세월을 씨름했다. 남편의 투병 중에 우리는 자주 이곳을 산책했다. 불안한 마음은 자연에서 위로받고, 용기를 얻기도 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지만, 남편은 지난겨울 홀연히 내 곁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무력감과 목적 없는 삶에 허우적거리며 우두커니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남편의 부재는 나를 수시로 흔들리게 하고, 그리움은 곳곳에서 고개를 든다. 강산이 네 번의 바뀌고 육 년이 더 지나는 동안 둘의 추억에 비례해 원망도 쌓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원망은 간 곳 없고 그동안 그 사람에게 해 주지 못한 후회와 아쉬움만 남는다. 생명이 소중한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역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마음이 너무 흔들려 갈피를 잡지 못하면 노트북과 책을 들고 음성도서관으로 간다. 새롭게 단장한 도서관에 들어서면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에 나도 자리를 잡고 집중하기 시작한다. 중심이 흔들릴 때 양팔로 평행을 잡듯 마음은 서서히 중심을 잡아간다.

원룸을 운영하는 우리 집은 손볼 곳이 자주 생기는데 그때마다 남편이 해결하고는 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겁부터 난다. 며칠 전에는 멀쩡하던 수도꼭지에 연결된 샤워기 줄이 빠졌다고 원룸에서 연락해 왔다. 앞으로도 빈번히 발생하게 될 일 앞에서 나는 난감했다. 그때 남편이 늘 내게 일러주던 말을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차분하게 마음먹고 천천히 하면 돼. 필요한 연장은 공구함에 다 있어.”

모처럼 찾은 쑥부쟁이 둘레길, 남편의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놓아본다. 그 사람의 따뜻한 마음과 강인했던 정신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뫼비우스 띠의 경계 없는 한 사슬에 연결된 고리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같은 시공에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랜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있는 공간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오늘 찍은 나의 발자국도 사라지겠지. 그 위로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발자국으로 새겨질 것이고, 세상은 그렇게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저수지 둘레길을 돌아 나오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은 서산으로 넘어갔는지 보이지 않고, 동쪽에서 해가 솟고 있다. 거울처럼 맑은 물속에는 하늘도 산도 모두 담겨 더욱 파랗다.

이 모두가 하나의 대자연이고 그 어디쯤인가에는 나도 자연의 작은 조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곁에 없지만 이곳 쑥부쟁이 길을 걸으면 자연의 일부로 언제든지 그를 만날 수 있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털구름 저 너머에서 잘 해낼 수 있다고 응원하는 남편의 미소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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