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입니다.
나는 물입니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0.05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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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시론
정 규 호 <청주시 문화사업 진흥재단>

색이 변해가는 풀잎에, 나뭇잎에 촉촉하게 머물다가 기화하는 나는 물방울입니다.

구름이 되어 세상을 굽어보다 비가 되거나 이슬이 되어 다시 이 땅을 찾아오는 나는 물입니다.

어느 깊은 산 속, 계곡에 몸을 섞은 나는 어름치며 열목어, 또는 쉬리 등 맑은 물고기를 마음껏 품에 안은 뒤 다시 흐름을 탑니다.

이때쯤 사람들은 나를 그냥 먹을 수 있음과 그렇지 않음으로 편을 가르며 때로는 살진 곡식의 자양분으로 삼기도 하고, 풍차를 돌려 에너지를 얻기도 하며, 나를 함부로 대하기도 합니다.

명경 같던 내 몸은 더 이상 세상을 비춰볼 기력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손을 담가 보신 일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손이 됐든 어린아이의 손이 됐든, 더럽고 깨끗함을 가리지 않고 나는 그저 손끝을 적실 뿐 별로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나는 형태가 없습니다.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사각형이 되고 동그란 그릇에서는 그 뜻에 따라 하는 나는 그저 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흐름에 몸을 맞기고 고도에 순응하며 아래를 지향하는 나는 바다라는 큰 꿈을 늘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면 천지사방으로 흩어졌던, 구름 되어 뭉쳤다가 정처 없이 헤어졌던 또 다른 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념이나 갈등의 차이도 느끼지 못한 채 우리는 곧바로 한데 뒤엉키며 '만수산 드렁칡'보다도 더 치밀하게 몸을 섞게 됩니다.

그러나 그 꿈에 다다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우여곡절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세상을 그대로 비추며 속살마저도 숨김없이 보여주던 나의 해맑음은 흐름이 계속되면서 점점 더 기력이 쇠잔해지게 됩니다.

하물며 먼지와 오물과 각종 배설물이 내 몸과 강바닥에 뒤섞이는 지경에 이르면 원래 아무런 빛깔도 없던 내 몸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 뿐 타의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되고 지배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부끄러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바닥으로 침잠하려는 퇴적물들을 들쑤셔대면서 내 모습을 영영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의 잣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그들의 욕심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못살게 굴며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아니 무작정 자기 힘을 과시하며 자기 마음대로 나를 재단하며 내 본래의 뜻을 왜곡하거나 호도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맑았던 내 본질을 기억하지 못한 채 흐린 모습의 나를, 당신들의 가멸찬 욕심과 닮은 나를 본래의 모습으로 여기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자기 뜻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폄하하며, 자기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나를 업신여기고는 스스로를 기꺼워합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나의 분자는 이미 물방울이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진리를 만들어 놓고 있고, 나는 철판도 두꺼운 유리도 끊어 내거나 자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늘 겸손하게 아래를 지향하면서 부드럽게 때로는 도도하게 이어지는 내 흐름은 괜한 돌팔매질이나 물 막음, 혹은 들쑤심에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내 푸념을 작금의 언론 현실, 특히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일부 언론의 자세를 빗대어 말한 것으로 착각하는 분은 없겠지요.

나는 그저 흐름은 계속되어야 하고 내 본래의 해맑은 모습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 뿐입니다.

물 많이 드세요. 건강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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