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를 볶으며
깨를 볶으며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3.07.1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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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오랜만에 아들이 온다기에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었다.

열무와 얼갈이를 섞어 김치를 버무리고 오이소박이도 한 통 시원하게 담갔다. 마지막으로 잡채를 하려는데 참깨가 똑 떨어졌다.

며칠 전부터 미리 볶아놔야겠다 싶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에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냉동고에 보관 중이던 마지막 참깨 한 봉지를 꺼내 물에 담그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방금 물에 담가놓은 참깨를 통통하니 불려 고소한 향을 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참깨를 물에 담가놓고 잠깐의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는데 문득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결혼 후 해마다 가을이 되면 엄마는 손수 농사지은 먹거리를 이것저것 보내주셨다.

여름이면 감자와 옥수수를 보내주셨고, 가을이면 김장할 때 넣으라며 고춧가루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항상 빠지지 않고 끼워 넣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참깨였다. 깨끗이 씻고 말려서 볶아만 먹게끔 손질된 참깨를 자식들 머리 숫자만큼 봉지에 나눠 담아서 택배를 보내주셨다.

어느 해 엄마가 보내주신 참깨 한 봉지를 볶다가 순식간에 새카맣게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 생전 처음 볶아 본 참깨가 숯덩이가 되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자 아까운 참깨를 태워버렸다며 핀잔과 함께 볶는 법을 상세히 일러 주셨다. 물에 담가 어느 정도 물기를 머금게 하고 약한 불에서 서서히 볶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로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해마다 보내주는 깨를 볶아 일용한 양념으로 먹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생각보다 깨를 볶아 요리에 올린다는 일이 귀찮아졌다. 마트에 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제품들이 얼마나 많던가. 한 해 두 해 먹지 않고 김치냉장고에서 잠을 재웠다.

차디찬 암흑 속에서 잠자던 참깨 봉지가 차례차례 밖으로 나오는 데에는 강산이 한 번 바뀌고 난 세월이 지난 때였다. 나이가 들어가며 차츰 먹거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가던 즈음이었다.

가족에게 좋은 걸 먹이고 싶어졌을 때부터 엄마가 보내주는 농산물은 그야말로 귀한 보물단지였다. 보내주시는 모든 먹거리를 알뜰히 챙겨 먹기 시작했다.

어느 해 유월이었다. 엄마가 깨 모종을 심으러 뒷밭에 나갔다가 더위에 쓰러지셨다.

다행히 지나던 이웃이 발견하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불행은 비껴갔지만, 그 여름 내내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삶의 기로에 서 계셨었다.

그렇게 한 계절을 병원에서 보내고 한껏 기력이 약해진 탓에, 농사를 더는 짓지 않으셨다.

손만 벌리면 언제든 얻어먹을 수 있던 참깨의 흔함, 그래서 주면 주는 대로 냉동고 구석에 넣어놓고 잊고 지냈던 그 모든 순간을 죄스럽게 생각한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바리바리 힘들여 농사지은 먹거리를 택배로 보내주던 그 시절들을 늦게나마 귀하게 생각한다.

이제 참깨를 볶아도 좋을 시간이다. 처음엔 중간 불에서 물기를 말리고 다시 약한 불에서 쉬지 않고 저어가며 참깨의 색깔을 살핀다. 토닥토닥 참깨 한 알, 두 알이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색이 노르스름하니 몇 알을 손으로 비볐더니 잘 으스러져 불을 끄고 식힌 다음 마지막 깨를 볶아 한 톨이라도 땅에 떨어질까 조심조심 병에 옮겨 담는다.

그리고 미처 끝내지 못한 잡채에 방금 볶은 깨 한 움큼을 넣어 버무리며 눈을 돌려 창밖을 본다.

친정엄마 덕분에 지금까지 알콩달콩 깨 볶으며 평안하게 살았다고 밤꽃 어우러지는 유월 어느 날에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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