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배
떠나가는 배
  •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 승인 2023.07.12 19: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술산책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참 경이롭다.

일찍 시작된 장마로 며칠째 노심초사했는데 공연을 앞두고 비가 그치더니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고요히 흐르는 강물 위로 가물가물 물안개마저 피어오르고 있다. 야외 공연이라 오전까지 계속된 비가 멈춘 것만으로도 마법이라 생각했는데, 해 질 녘 보기 드문 물안개의 장관 속에서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게 되다니 어찌 경이롭지 않은가!

땅거미가 질 무렵,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시작으로 교직원 오케스트라의 단양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내가 연주를 하는 것도 아닌데, 객석에서 연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된다. 내 생애 처음 편곡한 정태춘의 곡 `떠나가는 배'가 연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노래의 편곡을 부탁받았을 때에는 편곡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기에,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작곡 공부를 시작한 마당에 이보다 더 좋은 실전 공부도 없겠다 싶어 선선히 수락했다.

특히 젊은 날부터 좋아했던 노래이기에 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란 근자감도 한몫했다.

그렇지만 막상 편곡을 시작하면서 세상에 쉬운 건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게다가 이미 협연이 약속된 곡이니 연습 삼아 대충 마무리할 상황도 아니었다. 정성을 기울여서 편곡 작업을 이어갔다.

젊은 날에는 찬바람 속을 떠다니는 고독한 이미지가 좋아서 이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었다. 그런데 따사로운 평화의 땅을 찾아 떠나는 배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이젠 나이가 들었나 보다. 그러려면 화려한 선율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이 낼 수 있는 다양한 선율을 고려하며 악기마다 고유한 선율을 가지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노래에서 자꾸만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렵게 작업을 마치고 편곡 의도와 함께 완성된 작품을 지도 교수님께 보여드렸더니 이렇게 조언을 주셨다. “선생님, 기교보다 기본에 충실하는 게 좋겠어요. Am 코드라면 다른 기교 넣지 마시고 그냥 코드의 기본음인`라'음만 찍어 주세요. 기교보다 기본을 단단하게 찍고 가는 것이 훨씬 더 음악을 음악답게 만들고 음악의 맛을 살릴 수 있거든요.”

그랬다. 선율을 화려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힘이 빠져나간다고 느껴졌던 것은, 기본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화려한 기교를 통해서 노래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기본을 단단하게 만들어 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동안 작업했던 것을 모두 원점으로 돌려, 기교들을 추려내고 대신 기본음을 중심으로 멜로디와 리듬을 다시 짰다.

삶도 그렇겠지?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기교'가 아니라 `기본'일 것이다. 기본이 단단해야 힘이 있고 아름다울 텐데, 그동안 기본은 소홀히 한 채 기교만 가득한 삶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 삶에서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기본'은 무엇일까?

드디어 협연이 시작되었다. 비 갠 초여름 밤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에서 그렇게 작업한 내 첫 번째 편곡 작품이 연주되고 있다. 노래는 든든한 나의 후배이기도 하고 지금 교육문화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교직원 오케스트라 단장님이 부르고 있다.

이런 풍경이 참 경이롭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