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리의 가을
중리의 가을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3.06.1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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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부지깽이도 덤빈다는 가을, 농촌은 더없이 바빠진다. 어린 시절 우리 집도 이런저런 곡식을 수확하느라 부모님은 깜깜해서야 돌아오셨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오빠들은 소여물도 챙겨 주고 언니와 나는 청소며 저녁을 짓곤 했다.

그 시절, 모든 자식들은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애옥살이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명절이면 어머니는 대목장에 나가 자식들에게 줄 빔을 고르곤 하셨다. 아무리 살림이 곤궁해도 자식들의 마음까지 가난하게 만들지 않으시려는 어머니의 배려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을이 기다려지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양계장하는 친구네 집에서 일을 도와주고 달걀을 얻어오곤 했다. 중리 동네 첫 집인 장씨 할아버지네서였다. 그 집 손녀딸은 내 단짝이기도 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실 내가 그 집에서 달걀 걷는 일을 하게 된 것은 도시락 때문이었다. 나의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김치였다. 하지만 양계장 집 딸인 친구의 도시락은 밥을 덮은 기름진 달걀푸라이가 노랗게 빛을 내곤 했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내 도시락을 더 좋아했다. 이해가 안갔지만 그 친구의 요구로 어느 날부터는 학교에서 밥을 남겨 하굣길에 바꿔 먹기로 했다. 남신초등학교에서 우리 동네 중리를 가려면 낙엽송이 우거진 숲길을 지나야 했다. 우리는 폭신폭신한 낙엽송 길에 주저앉아 도시락을 바꿔 먹으면서 주위가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나는 맛있어서 행복했지만 그 친구는 뭐 때문에 그리 행복해 했는지는 몰랐다.

우리 집도 닭을 키우기는 했다. 하지만 서너 마리 암탉들이 알을 낳는 것은 고작해야 하루에 두 알 정도였다. 더구나 그 달걀은 모두 큰오빠 차지였다. 친구는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의 양계장에서 일을 도와주면 달걀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사실 친구는 할아버지의 강요로 매일 계란을 내리는 일을 해야만 했다. 부잣집 딸이니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런 고충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장씨 할아버지네 양계장은 큰말에 있었다. 밤낮으로 환하게 불을 밝힌 양계장을 보며 그때는 닭들을 그토록 혹사한다는 생각은 못했다. 어린 마음에 설레는 마음으로 양계장 안으로 들어가니 닭똥 냄새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선선한 가을임에도 닭장 하우스 안은 얼마나 덥던지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달걀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냄새도 답답함도 잊을 수 있었다. 그 많던 달걀을 친구와 부지런히 걷고 나니 장씨 할아버지는 상품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들을 골라 주셨다. 매번 상품성이 떨어지는 달걀이 이렇게나 많이 생긴다니 놀라웠다. 그러니 친구네 집 밥상에는 언제나 달걀이 올라왔을 거고 도시락까지 보태니 질릴 만도 했을 것이다. 그동안 부럽기만 했는데, 한편으로는 측은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집 밥상을 생각하면 여전히 부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장씨 할아버지가 수고비 대신으로 주신 계란을 치마에 담아 집으로 가져 왔다. 그 후로도 가끔 친구네 집에서 일하고 얻어 온 덕분에 달걀은 더러더러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얻어 온 달걀은 추석 차례 상 앞줄에서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나를 뿌듯하게 해 주었다. 육고기를 잘 먹지 못하면서도 달걀 요리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식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마 그때부터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장씨네 할아버지 양계장은 산을 두르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을 만큼 산의 가을 단풍은 여간 고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씨 할아버지의 양계장도, 그 아름답던 뒷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번듯한 공장과 집들로 바뀐 지 오래다. 다행인 건 장씨 할아버지네 양계장과 그 가을 산은 여전히 내 가슴에서 오롯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달걀만 보면 문득문득 생각나는 그 시절, 내 어린 시절의 옹근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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