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할 때
비워야 할 때
  •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05.07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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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던 어느 날 밤, 비장한 마음으로 집을 둘러보았다. 아이들과의 추억이 빼곡히 담겨 있던 탓에 차마 버릴 수 없어 미련하게 가지고 있던 세월 동안, 숨길 수 없었던 무게감에 집안을 숨 막히게 했던 오래된 전집들에게 마침내 이별을 고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책장에서 한 권, 한 권 꺼내 박스에 담을 때마다 누가 필름이라도 돌리듯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교자상을 펴놓고 둘러앉아서, 이부자리에서 쪼르르 누워,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며, 가끔은 눈물도 지으며 함께 읽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희미한 거실 등 아래에서 “이 책은 진짜 많이 읽었는데, 이 책은 딸이 정말 좋아했던 책인데”라며 아쉬운 마음에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보다 못한 남편이 한마디 건넸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지” 단조로운 남편의 말에 서운한 감정이 금세 마음을 물들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너무나도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새 책들 때문에 이미 아이들에게는 `옛날 책'이 되었기에 다시 재미있게 읽어줄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도리라는 걸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했을 뿐. 그렇게 박스에 담긴 몇십 권의 책들은 새 주인을 찾아 떠나갔다.

항상 빈틈없이 차 있던 책장이 널널해진 모습에 며칠은 마음이 허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허전했던 마음은 조금씩 줄어들고 후련한 기분이 차올랐다. 그리고 책을 치운다고 해서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책장의 빈 곳을 어떤 새로운 책으로 채울까 고민하다 문득 떠오른 일이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일이다. 사소한 오해가 쌓이고 쌓여 결국 관계가 흐트러진 이들이 있었다.

분노와 서러움, 비난과 사과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대화 끝에 오해는 풀렸지만 한번 틀어진 관계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죽마고우'나 요즘 말로 `찐친'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오랜 만큼 같이 만들어온 추억도 많았기에 그 모든 과정은 나에게 꽤 큰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더 힘들었던 건 그 이후로도 여전히 어설프게 엮여 있는 나와 그들과의 관계였다. 그런데 그때 남편의 말을 빌려 책장이 말을 걸어왔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지” 그랬다. 내가 비워야 할 것은 책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너무도 힘들게 억지로 붙잡아 온 인연들을 이제는 비워내야 할 때였다.

살다 보면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 인연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요즘 말로 `손절'을 밥 먹듯이 하는 것도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나 자신을 한편에 밀어 둔 채 다른 명분을 위해 괴로운 인연들을 이어가는 건 더 잘못된 선택일 것이다.

사람이 자연인이 되어 혼자 산에서는 어찌어찌 살아간다 해도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쓰레기 집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끝내 정리하지 못했다면 결국 쓰레기가 되어 버려졌을 오래된 전집처럼, 함께 했던 시간까지 악취가 나기 전에 이제는 힘들어진 인연들을 하나하나 비워보려 한다. 언젠가 그 자리를 밝혀 줄 새로운 인연들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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