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등
그대의 등
  • 박윤미 수필가
  • 승인 2023.04.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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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윤미 수필가
박윤미 수필가

 

밤새 깨지 않고 푹 잤으니 다행한 일이긴 하다. 문제는 밖에 있지 않았다. 바로 나였다. 꽤 오랫동안 뒤척이는 날이 이어졌다. 매트리스를 두 번이나 바꿨는데도 계속 불편하니 내게 맞는 매트리스를 영영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하게 됐다. 오늘은 괜찮을 거라고 기대하며 잠들지만 매번 힘든 밤이 이어졌다.

밤이 오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을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는데 매트리스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하셨다. 내게 엎드리라고 하고는 머리부터 목, 등, 허리, 엉덩이와 다리까지 내 뒤를 꼼꼼히 눌러 굳어진 근육을 풀어주셨다.

그날 밤 신기하게도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잤다. 선생님 말씀대로 매트리스 때문에 고생한 게 아니었나 보다. 문제는 내 등인 듯하다. 평소에도 간혹 그랬지만 나이가 들면서 최근에는 아주 뻐근하게 느끼게 되었다. 쉴 때는 어깨와 등에 힘을 빼고 웅크린 자세로 있다가 일할 때면 온몸에 힘이 팍 들어가는 몸의 습관이 문제다.

항상 나였던 나의 등은 내게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내 짐을 감당해 주기도 했던 `나'다.

가만 보니 큰딸의 등도 나를 닮았다. 컴퓨터로 디자인 작업하느라 매일 긴 시간 자리에 앉아있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어느새 이렇게 컸나 흐뭇하고도 안쓰러운 마음에 엎드리라고 해 놓고 머리부터 목덜미, 어깨와 등, 그리고 척추뼈 하나하나를 천천히 꾹꾹 눌러주었다. 내 등을 닮은 등 진작 더 많이 쓰다듬어 주지 못한 등을 꼭꼭 짚어주었다. 나는 근육과 신경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단단하게 잡히는 근육은 좀 더 세게 여러 번 조물조물 주물러주고 뼈와 뼈가 연결된 부분은 지그시 눌러주며 나름 전문 안마사가 된 듯도 싶었다. 딸은 간지럽다며 몸을 비틀기도 하고 아프다고 소리치면서도 그만하라는 말은 않는다. 뜻밖의 호사에 시원하다며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척추는 신경 다발인 척수가 지나는 큰길이고 척수에서 나오는 신경이 손과 발, 위장과 온몸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토닥여 주고 체했을 때 등을 쓸어주고 두드려 주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잘 설명되는 지혜이다.

어린 여고생의 감성에 헤르만 헤세를 좋아했었다. 안개 낀 깊은 숲, 이것이 삶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어느 쪽으로 걸어가야 할지, 지금 향하는 길이 옳은 길인지 알 수 없어 막막할 때마다 생각나는 시가 있다.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덤불과 돌은 모두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 보이지 않는다./모두가 혼자이다.'

우리 모두 이 숲에서 각자 걷고 있다. 각자의 짐을 메고, 동행은 오직 `자신' 뿐이다. 앞으로도 평생 함께 가야 할 우리 사이다. 딸아이도 어느새 자신의 짐을 거뜬히 짊어지고 출발했다. 나와 아이는 어느 간격을 두고 세상을 계속 걷고 있다.

나의 20대를 돌아보면 세상이 온통 불투명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까, 저 끝에 어떤 것이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는 것일까?

잠시 후 큰딸이 `엄마에게 복수해 주겠다'며 일어선다. 이번엔 내가 엎드려서 간지럽다며 까르륵거린다. 내 등을 꼭꼭 눌러주는 딸아이의 간질간질하고 따뜻한 손길에 내 등이 가볍게 보드라워진다.

`딸, 네 짐을 대신 져줄 수는 없지만 엄마가 함께 걷고 있어. 자연의 숲엔 안개 자욱한 날도 많고 산뜻하게 갠 날도 있단다. 우리 꿋꿋이 걸어가자. 그리고 엄마도 네가 함께 있어서 든든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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