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 앞에서
맨드라미 앞에서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10.2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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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천상 수탉의 볏이다.

꼭대기 부분은 붉은 벨벳처럼 빛나고 아래로 희끗희끗 씨 있는 거친 부분까지 똑같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맨드라미를 계관화(鷄冠花)라고 부른 모양이다. 요 며칠 밤낮으로 일교차가 크더니 맨드라미 붉은색이 더욱 진해진 것 같다.

담장과 콘크리트 길 사이 세모로 길쭉한 좁은 땅에, 씨를 뿌린 것도 아닌데 해마다 맨드라미가 핀다. 봄도 다 지나간 어느 날에 삐죽이 싹을 틔우고 늦어진 만큼 부지런히 키 키우고 점점 몸집을 불려간다. 그러다 어느결에 붉은 꽃잎을 머리 위로 활짝 펼치고는 가을 내내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번번이 담벼락 앞에 멈춰 서서 이 당찬 꽃에 혼을 뺏기곤 한다. 벨벳처럼 윤이 나는 꽃잎을 가만 쓰다듬어 본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분주하게 달려온 고단함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옛 그림에 보면 맨드라미가 곧잘 등장한다. 몇 년 전 8폭 병풍으로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그렸을 때 맨드라미를 그린 기억이 있다.

붉게 핀 맨드라미와 활짝 피어난 과꽃 옆으로 세 마리의 나비가 날고, 땅에도 세 마리의 쇠똥구리가 동그란 쇠똥을 굴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민화에서 맨드라미는 벼슬, 즉 관운을 상징하는데 신사임당은 세 명의 아들이 벼슬길에 오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 장승업의 그림 <닭과 맨드라미>에서처럼 `관상가관(冠上加冠)'이라 하여 벼슬 위에 벼슬을 더한다는 뜻으로 맨드라미와 닭을 함께 그리는 경우도 많다.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하라는 간절한 염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봐서 그럴까? 빛나는 벼슬에 까만 씨앗을 품고 올차게 서 있는 맨드라미가 위풍당당하다. 자세히 보니 길 가 풀 섶에도 작은 꽃들이 피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꽃인 줄 모를 만큼 작고 색깔도 화려하지 않은 꽃이다. 하지만 저 꽃들은 어떤 특별한 향기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거기에 벌 나비가 날아다니는 걸 보면.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줄 무기가 없는 소박한 꽃들이 향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여러 날을 깨끗한 이슬로 마음을 닦고 또 닦고 했으려나. 이제 곧 결실의 임무를 완성할 풀꽃 역시 유유하다.

며칠 전에는 동문수학하던 글동무 중 하나가 첫 수필집을 출판했다. 수필교실 식구들을 초대해 오붓하게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회원들 모두 함께 축하하며 건필을 응원하는 박수를 보냈다. 나 역시 내 일인 양 진심으로 기뻐하며 사회를 봐주었다. 그런데 축하하는 마음 한구석 부러웠었나 보다. 짧아지는 가을 해처럼 내게 남은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꾸 조급해지는 걸 느꼈다. 그동안 나만의 보폭과 속도에 맞춰 잘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혹시 보폭을 좁게 잡은 건 아닌지, 속도를 너무 늦춘 건 아닌지 머릿속이 심란했었다.

뒤늦은 나이에 글 씨앗을 품어 싹 틔우고 이제 겨우 꽃잎 하나 피워낸 보잘것없는 가을 풀꽃, 그게 지금의 내 모습이다.

분명 존재 이유는 있을 텐데, 그리고 아직은 가을볕도 넉넉하고 마음 씻어 말릴 이슬과 바람과 별빛도 충분하다.

삶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향기를 품어야 할까? 매혹적인 향기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늦가을 들깨 터는 밭에서 고샅길로 번져오는 고소한 기름내여도 좋을 것 같다.

삿된 욕심 뿌리치며 촘촘하게 주름 접어가는 맨드라미 앞에서 잠시 어지럽던 마음을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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