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문백전선 이상있다 <351>
42. 문백전선 이상있다 <351>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24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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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로가 몽땅 다 막혀버렸습니다"
글 리징 이 상 훈

낙계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지금 성이 잔뜩 난 적병들은 죽창을 꼰아쥔 채 죽일 듯이 다가오고 있는데, 바로 앞에는 천길만길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깊은 계곡이 가로막고 있다니.

'아! 내가 그만 적의 사정을 잘못 안 탓에 지금 이런 환장할 지경에 처하고 말았구나!'

망연자실해 버린 낙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저 멀리 산등성이에 걸려 있는 맑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시 중얼거렸다.

'아버지 얼굴은 아예 모른 채 홀어머니에게서 유복자로 태어나 자라난 나, 낙계는 일찍이 청운(靑雲)의 큰 뜻을 품고 학문과 무예를 배우기에 온 힘을 쏟았다네. 하지만 아무도 날 알아서 거둬주는 이가 없었으니…. 혹시나 선택되어 귀하게 쓰이지는 않을까 싶어 옥성(玉城)을 찾아갔지만 취라성주님을 만나 뵙기도 전에 번번이 문전에서 박대를 받고 말았지. 인재가 풍부하게 넘쳐나는 한벌성에서는 타지(他地) 사람인 나를 아예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인근 팔결성이나 소수성에서도 날 받아주지 않았다네.

하늘을 원망하며 어쩔 수없이 내가 그 푸른 꿈을 접어버리려고 했을 때, 마침 고향을 찾아온 문강 백락 두 장수님의 눈에 띄게 되어 나는 그렇게도 소망이던 군사(軍師) 자리를 얻게 되었지.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힘을 다해 두 분의 은혜에 보답을 해드리고자 하는 이때에 정말 어이없는 이런 개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다니, 아! 아! 저 푸른 하늘, 잘 생긴 하늘이 원망스럽도다!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내가 내 뜻에 따라 여기를 찾아왔으니 나야 뭔가 책임을 져야한다지만, 이 못난 나를 믿고 이런 험지(險地)까지 함께 와준 동지들에게 내 어찌 사죄를 할까! 정말로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이 야속하고 세월이 야속하며 운마저 야속하기만 하도다!'

바로 이때, 사양과 부하 몇 명이 숨넘어갈 듯 허겁지겁 달려와 낙계에게 소리쳤다.

"낙계님! 낙계님!"

"큰일 났습니다. 퇴로가 몽땅 다 막혀버렸습니다."

"놈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놈들과 맞서다가 단 한 놈이라도 더 베어버리고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를 듣고 낙계는 조용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우리가 더 이상 힘들게 싸울 필요는 없어졌소."

"네에"

"아, 아니. 그, 그럼."

부하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낙계를 쳐다보자 그는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이렇게 다시 말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금 저들도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에겐 귀여운 자식이요, 처자식에게는 하늘같이 우러러 보이는 가장이 아니겠소 지금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기만 하면 간단할 것을 왜 저들을 죽음의 구렁텅이 속으로 함께 끌고 들어가려 하오 수고 많이 하셨소, 여러분! 미욱한 나를 끝까지 믿고 따라준 결과가 겨우 요모양 요꼴이 되고 말았으니, 나로선 그저 쥐구멍을 찾고 싶을 뿐이라오. 혹시 우리가 모두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 만난다고 한다면 나는 그곳에서 여러분의 발뒤꿈치를 핥아대는 충실한 종이 되어드릴 것을 약속드리오. 자, 나는 먼저 가겠소!"

이렇게 말을 마친 낙계는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험한 계곡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져버렸다.

"아앗! 낙계님!"

"낙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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