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는 그나마 양반이다”
“`서리'는 그나마 양반이다”
  • 하성진 기자
  • 승인 2021.09.0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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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하성진 취재3팀장(부장)
하성진 취재3팀장(부장)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하굣길 또래 3명과 동네 수박밭을 `무단 침입'했다. 엉금엉금 밭을 기어들어 가 수박 한 통씩을 머리에 이고 몰래 빠져나왔다.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어디선가 “도둑놈 잡아라”는 고성이 들렸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기를 쓰고 딴 수박은 어느새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친구 녀석 한 명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4명의 `수박 서리'는 실패했다.

주인에게 잡힌 초등생들은 창졸간 도둑 신세가 됐다. 부모가 찾아와 허리 숙여 사과하면서 이들의 `수박 서리 사건'은 일단락됐다.

국어사전에 `서리'는 떼를 지어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이라고 뜻하고 있다. 1970년대 세대라면 어렸을 적 서리를 했다가 된통 혼쭐난 경험이 한 두 번은 있을 테다. 예전에야 밭 주인도 `애들 장난'으로 생각하고 용서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엄연한 절도 행위다 보니 처벌이 뒤따른다. 또래들과 장난삼아 한 서리가 과거 초등생들의 비일비재한 범죄였다면 이제는 그 유형이 확연히 달라졌다. 혹자 말을 빌리면 서리는 그래도 양반이라고 한다.

촉법((觸法·10세 이상~만 14세 미만)을 방패 삼아 위법을 저지르는 10대가 늘고 있다.

어린 초등학생이 저지른 범죄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흉악하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있다.

`중학생 딸이 또래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촉법소년이라 처벌이 미약하다'는 내용의 글이다.

범죄를 저지른 남학생은 경찰에 긴급체포 됐지만, 곧바로 가족에게 인계됐다. 형사책임을 지지 않는 촉법소년이기 때문이다.

촉법소년은 형사처분을 받지 않는 형사 미성년자다. 가정법원으로 넘겨져 `소년원 송치', `가정 및 학교로의 위탁 교육' 등과 같은 처분을 받는다.

교육과 보호가 주목적이다 보니 범행 기록(전과)도 남지 않는다. 범행 정도와 처벌 사이에 적잖은 괴리가 있는 셈이다.

흉악한 범행을 하고도 법망을 피해 가는 촉법소년이 지속해서 나오는 까닭에 형사 미성년자의 기준 연령 조정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국민의힘 김용판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촉법소년 송치현황은 2016년 6576명, 2017년 7533명, 2018년 7364명, 2019년 8615명, 2020년 9606명이다.

범죄 유형별로 보면 절도(2만1198건)가 가장 많고 폭력(8984건), 강간·추행(1914건), 방화(204건) 순이다.

연령별로는 만 13세가 2만5502명으로 가장 많고, 만 12세 3768명, 만 11세 3571명, 만 10세 2238명이다.

정치권 등에서는 촉법소년을 비롯한 청소년 범죄의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처벌이 아니라 교화에 초점을 맞추는 촉법소년 제도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강력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까지 나이가 면죄부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법조계에서는 소년법에 설정된 만 14세라는 형사미성년 연령은 예외를 두지 않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애초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검증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청소년 범죄는 날로 과격해지고 대범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재범이 발생하지 않도록 강력·집단 범죄에 대해선 엄정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촉법소년의 연령을 현 시대적 상황에 부합할 수 있는 사실적인 기준으로 재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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