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의 죽음
진급의 죽음
  • 박경전 원불교 청주 상당교당 교무
  • 승인 2021.06.1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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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박경전 원불교 청주 상당교당 교무
박경전 원불교 청주 상당교당 교무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날이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죽으면 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충일에 추모를 받는 영령들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추모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들이다. 죽음이 찾아와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해 선택을 하고 죽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누군가를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예전에 본 단편영화가 생각난다.

철로의 방향을 틀어주는 일을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아들이 철로에 끼이게 되었고 아버지는 그 철로의 방향을 아들이 있는 쪽으로 돌려야만 하는 순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아들이 있는 쪽으로 철로를 전환하지 않으면 기차에 타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리에서 떨어져 모두 죽을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느냐, 수백 명의 승객들을 살리느냐는 선택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목숨과 수백 명의 목숨이 갖는 무게의 차이. 실화로 알려진 영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차라리 자신이 아들 대신 죽고 싶었을 것이다.

예전에 불경을 보면서 들었던 의문이 있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의 결과가 결국 죽음이라는 예화를 보면서 들은 의문이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하고 전생과 내생을 이야기하는데 왜 마치 죽음이 끝인 것처럼 죄지은 자들의 결과를 죽음으로 이야기할까 라는 의문이었다.

필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아름다운 요절을 이야기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는데 중년이 되고 몸에 기저질환들이 생기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다 보니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죽음은 단순하지 않다. 생명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죽음 역시 수많은 죽음이 있고 그 죽음마다 수많은 의미가 있다.

현충일을 맞아 원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두 가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진급이 되는 죽음과 강급이 되는 죽음이다.

진급은 올라가는 것이고 강급은 내려가는 것이다. 죽음은 죽음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죽음은 삶을 포함한 죽음이다.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죽음을 맞이하느냐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다음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을 개차반으로 살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삶을 개차반으로 살았다면 죽음이라도 아름답게 죽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인과라는 저울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예화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죽음은 진급의 죽음이다. 철로에서 죽은 아이의 죽음 역시 그렇다. 죄를 지은 사람의 끝이 죽음인 것은 강급의 죽음을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는 것은 내 삶이 진급의 삶이었는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또, 과연 내가 진급의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100년을 살아도 죽음은 두렵다. 20년을 살고 맞는 죽음과 100년을 살고 맞는 죽음 모두 불시적이고 두려운 일일 뿐이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진급의 죽음이다. 모든 종교가 말하듯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진급의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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