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능소화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1.03.2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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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며칠 전 축령산에 있는 아침고요수목원에 갔다가 화단 가운데 우람한 나무를 휘어잡고 오르는 능소화를 보았습니다. 능소화는 모양이며 색깔이 유난히 산뜻하지요. 산뜻해서 시원하게(?)까지 느껴지는 능소화를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른 꽃들처럼 자연스럽거나 순수하게 다가오지 않고 뭐랄까, 조화나 드라이플라워 같다고 할까, 가식적인 몸짓의 규격화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서와 다른 꽃이란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색깔은 중국의 호사스러운 비단 같은데 왜 게다짝에 기모노를 입고 목덜미에 하얗게 분칠한 일본 여인의 모습이 떠오를까요?

저의 고향 집 이웃에 김부자집이 있었습니다. 근처 몇십 리는 모두 그 집 땅이었다니 남의 땅은 밟지 않고 살았다든가 하는 굉장한 부자였지요. 하인만도 수십 명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집 막둥이 도련님은 일본 와세다대학에 다녔다고 했는데 대학 권투선수이기도 했던 그의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졸업 앨범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건장한 체구와 잘생긴 모습으로 일본 황실의 여인과 밀애를 할 정도로 능력 있는 분이었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한 번씩 고향에 내려올 때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온통 거리가 북적거렸답니다. 사각모에 긴 망토를 펄럭이며 멋진 말 위에 앉아 늠름하게 지나가는 모습은 요즘 스타들처럼 군중을 몰고 다니기 충분했지요.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이 가슴 두근거린 여인도 하나 둘이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격변하는 세월과 함께 모두 전설처럼 사라진 그 집 담벽에 능소화가 피어 있던 생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많던 하인들마저 뿔뿔이 흩어지고 서슬 푸르던 영감님은 노망이 나셔서 대문 앞에 나와 지팡이를 휘저으며 혼자 수없이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도로가 놓인 국도 1번지가 가로놓인 곳이었는데 어쩌다 목탄차가 검은 연기를 내며 힘겹게 지나가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던 영감님, 어른들은 쯧쯧 혀를 차며 슬슬 영감님을 피하지만 철없는 어린것들은 마구마구 신이 나서 외쳐댑니다.

`영감아 땡감아 죽지를 말아라. 인절미 콩떡에다 꿀 발라 줄게….'여섯 일곱 정도의 꼬맹이들이 어깨동무하고 깔깔대며 놀려대던 이 노래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의 구전 가요에 기록되어 있더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녹두장군 울고 간다//장다리는 한철이고/ 미나리는 사철이라'는 노래도 구호처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동네의 꼬맹이들마저 모두 흩어져 버린 수십 칸짜리 기와집 돌담에서 능소화는 외롭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대로 두었다면 문화재 몇 호쯤은 되었을 그 집은 다른 재벌이 뜯어서 부안 어디에 다시 개축했다는 소리도 훗날 얻어들었지요.

덧없음을 생각해도 어김없이 떠오르는 김부자댁 영감님과 도련님 그리고 능소화…. 능소화는 농투성이 마당가에는 살지 않고 양반가에서만 살았다 하지요. 해방과 더불어 몰락해간 양반가의 돌담 밑에서 홀로 피어 있던 능소화는 전설이 된 고향의 이야기를 끌고 오네요.

`헐어진 담에 능소화 피었다/망토에 소문을 몰고 다니던 먼 도련님이 품어 온/작은댁 앞가슴의 주홍 브로치//기왓장 사이/잡초 우거진 중문 돌담에 기대앉은 영감은/지팡이 휘저으며/속 빈 호령 멈추지 않아/문밖에 왁자글 아이들은 흩어지고/얼굴에 주홍 물든 작은댁은/두 개의 문턱을 넘어/형부를 따라나섰네//중문 밖 버려진 브로치/아직도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 시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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