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자유
운명과 자유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2.2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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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도 있는 그대로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더구나 극한 상황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의 상황이라고 가정을 해 보자.

자신이 보는 앞에서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죽어나가고 자신의 차례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하고 삶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희박하지만 살아날 희망이 있다면 누구라도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나려 몸부림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닌 삶에 대한 본능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비열하기도 하고 구차해 보이는 행동을 통해 살아난 자신의 그런 모습은 죽도록 싫어질 수도 있다.

그동안 홀로코스트를 체험하고 살아났거나 죽어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소설이나 다큐멘터리로 혹은 영화로라도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악마가 되어 가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 준 작품들이었다. 듣기만 해도 두렵고 무서워 공포에 떨게 만드는 참상들이다. 그동안 내가 읽었거나 보았던 책이나 영화에서도 아우슈비츠에서의 살상은 비통함에 치를 떨게 만들곤 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실화라는데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러한 지옥 속에서 살아남았음에도 그곳에서도 행복은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바로 `임레 케르테스'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 《운명》은 그의 자전적 소설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완독하고 느꼈던 것은 허탈함을 넘어 공감의 부재로 느껴졌다. 그동안 여타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작품과는 결이 다른 작법이었다. 죽음과 고통마저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담담히 서술해 나가는 작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화를 돋우게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잔인하면서도 무도한 나치 독일군을 두고 깔끔하고 정직함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자신의 곯은 다리와 엉덩이를 제대로 치료도 해 주지 않는 의사에게까지도 정확하게 업무를 본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작가가 의도하는 바는 아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런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하는 소설 말미의 글에서 우리는 드디어 고통의 몸부림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작가 스스로가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닌 독자들에게 그 아픔의 깊이를 던져주고 종국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분노를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음에도 순간순간의 행복을 끄집어내고 웃고 있는 작가를 떠올린다.

작가는 열네 살 소년 죄르지 쾨베시를 통해 운명에 대한 견해를 내 놓는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으며, 자유가 있으면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 곧 우리 자신이 운명이라는 뜻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음의 모습을 보았던 소년에게 그것은 과거가 될 수 없으며 전 생애를 악몽으로 따라다닐 터이다.

그래도 `죄르지'와 `임레 케르테스'가 홀로코스트를 운명이라 받아들이지 않고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았기에 자유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여기서 위안을 삼아야 하지 않을까. 운명과 자유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이, 저마다의 앞날이, 운명이 두렵더라고 순간순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열심히 살아간다면 우리의 행복도 그리 멀리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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