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원소매
산원소매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1.02.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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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꽃을 말하면서 우두머리 운운한다면 저속하게 들릴 수 있지만, 매화를 일러 꽃의 우두머리 즉 화괴(花魁)라고 일컫는 것은 도리어 당당해 보인다. 꽃을 피우기 어려운 한겨울에 추위를 무릅쓰고, 꿋꿋하게 피워내 온갖 꽃들의 개화에 물꼬를 튼 용기는 우두머리 소리를 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북송(北宋)의 시인 임포(林逋)는 꽃의 우두머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명구를 남겨 놓았다.



산속 뜰의 작은 매화(山園小梅)


重芳搖落獨暄姸(중방요락독훤연) 온 꽃이 지고 난 후에 홀로 곱게 피어
占盡風情向小園(점진풍정향소원) 작은 뜰 풍치 다 차지했네
疎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개울에 비스듬히 기울고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그윽한 향기는 어스름 달빛 아래 떠도네
霜禽欲下先偸眼(상금욕하선투안) 서리새 앉으려고 먼저 주위를 훔쳐보는데
粉蝶如知合斷魂(분접여지합단혼) 흰나비도 알았다면 넋이 빠졌으리.
幸有微吟可相狎(행유미음가상압) 다행히 난 시 읊으며 서로 친할 수 있으니
不須檀板共金尊(불수단판공금준) 노래판에 좋은 술이 없어도 되네

시인이 기거하는 산속 집에는 작은 뜰이 있어서, 철 따라 온갖 꽃들이 거기 피어나 자태를 뽐낸다. 그런데 가을이 지나고 나면 다 져버려, 뜰은 쓸쓸한 모습으로 겨울을 나야만 할 처지인가 싶었다. 이때 구세주처럼 시인의 뜰에 매화가 나타나 겨울의 긴 쓸쓸함을 단박에 물리쳤으니, 과연 꽃의 우두머리답다. 아직 잎이 돋기 전이라 가지는 성길 수밖에 없어서 꽃이 더 도드라진다. 그 성긴 가지가 비스듬히 맑은 물에 비치는 광경은 매화의 고매한 자태를 대변한다. 그리고 황혼녘 달이 떴을 때, 달빛 속에 떠도는 그윽한 향기는 매화의 멋스런 기품을 웅변한다.

이 뜰에 찾아온 매화의 자태와 기품에 반한 것은 시인만이 아니다. 겨울새도 주위를 훔쳐 보면서 그 가지에 앉아 보려 하지 않던가? 나비가 없는 겨울이기에 망정이지, 나비가 알았더라면 넋이 빠졌을 것이다. 시인도 이에 질세라 글 솜씨를 앞세워 매화에 다가선다. 평소 술을 마시며 겨울 뜰의 쓸쓸함을 견디던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술이 필요 없게 되었으니, 이게 다 매화 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줄을 잇는다. 이제 겨울은 물러날 채비를 해야 한다. 개울물에 비친 매화의 성긴 가지와 달빛 아래 떠도는 매화의 그윽한 향기야말로 겨울에게는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이리라.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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