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각시
우렁각시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20.09.06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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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별생각 없이 앞차의 꼬리를 물고 가다가 잠시 멈추었을 때, 눈앞에 커다란 태양이 딱 나타났다. 도시 너머의 지평선 위에서 서쪽 하늘을 온통 다 붉게 물들이고도 독보적으로 시뻘건 아주 커다랗고 둥근 태양.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 오늘에야 새삼스럽게 태양이 별인 것이 생각났다. 저 뜨거운 별이 없다면 이 세상에 온기는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를 태워 이 먼 곳까지 전하는 온기, 우리는 모두 그 품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이 순간 왜 엄마가 생각났을까?

엄마는 가끔 전화해서 네가 운전하는 거 생각만 하면 걱정이 돼서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왜 걱정을 사서 하느냐고 한다. 아침에 오는 엄마 전화는 반갑지가 않았다. 밤새 꿈이 흉흉하니 오늘 하루 조심하고 지내라는 말이 보통이다. 그 말 때문에 괜스레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진다.

그런데 이런 것일까?

엄마도 문득 내 생각이 났던 거구나. 그냥 생각이 났고, 그리고는 전화해서 네 생각이 났다고, 그것을 그렇게 말했던 거구나. 어느 날은 내가 운전할 때였고, 어느 날은 아침에 깨어 내가 생각난 거구나. 오늘 내가 태양을 보고 그냥 문득 엄마가 떠오른 것처럼 그런 거였구나. `네가 생각났어.'라는 뜻을 가진 엄마의 특별한 언어를 알아듣게 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엄마, 나 보고 싶구나.' 이렇게 말했을 텐데.

늦은 시간에 돌아온 어느 월요일, 참외 한 상자와 그 위에 놓인 작은 상자가 먼저 보인다. 누가 왔다 갔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이미 제법 늦은 시간인데 안 주무시려나 생각하는 사이,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들리는 엄마의 맑은 목소리.

“지난번에 참외가 너무 커서, 이번엔 작은 거로 샀어. 단지 안 단지 먹어봐. 자두는 좀 싱겁더라. 그래도 몸에 좋으니까 먹어. 오이장아찌 먹어봤어? 물에 담갔다 무치면 맛이 없어, 짜도 밥반찬 하면 괜찮아. 열무김치 먹어 봐, 연해서 맛있어. 아부지는 그걸로 밥 한 그릇 다 먹더라. 냉장고 야채 칸 열어 봐. 아주 조끔씩 쌌어. 호박잎 쪄먹어 봐. 꽈리고추는 큰 건 매워서 엄마가 먹구 작은 거만 넣었어. 파도 다 다듬었어. 너는 버리는 것도 다 돈이니까. 먹다가 시들면 먹지 말구 가져와. 밭에 뿌리게. 그리구 싱싱한 거 또 갖다 먹어.”

냉장고 안에는 꽈리고추, 오이고추, 애호박, 가지, 오이, 호박잎, 부추, 파. 투명한 봉지들이 예쁘게 열 맞추어 놓여 있었다. 호박잎은 줄기를 벗겨냈고, 부추며 파의 하얀 밑동이 가지런하고, 가지는 꼭지까지 하얗게 깎았고, 꽈리고추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것들만 담겨 있었다. 태양 아래 싱싱하게 자란 채소들이었다.

엄마는 두고 간 하나하나를 내게 다시 짚어주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한참 일러주고는, 피곤할 테니 얼른 씻고 자라는 말을 남기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초저녁부터 내내 기다렸을 것이 눈에 선하다.

엄마의 기다림은 지난 주말부터였을 것이다. 아니 그전부터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토요일에도 기다리고, 일요일 한낮이 되도록 기다리다, 저녁에는 오겠지, 그러다가 결국 너무 늦어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시간이 되어서야 누구도 기다리지 않았던 것처럼 평상시처럼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월요일에 살짝 다녀간 것이다. 일하는 데 방해될까 연락도 없이.

내 존재의 근원, 이 세상의 온기의 원천, 아침이 오고 밤이 오는 것이 수없이 반복되는 동안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주는 태양,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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