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창가의 단풍나무
내창가의 단풍나무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20.07.19 1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자기소개서에 아이는 장래 희망이 도배사라고 했다.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 5개 중에는 `게으름, 잠, 무기력'이라는 단어가 있었고, 여러 질문에 빈칸으로 답했다.

아이의 글씨체는 꼬불꼬불 자잘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또박또박하게, 크게 쓰라고 틈틈이 강조하여 말한다. 글씨의 크기가 마음의 크기요, 힘 있는 획을 그을 때마다 마음이 곧아지고 힘이 생긴다고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한다. 간혹 예외는 있었지만, 지금껏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귀납적 탐구 결과인 셈이다. 글씨를 조금만 더 크게 쓰면 조금 느려지고 자연스럽게 획에 힘이 생기고, 미세하지만 내면에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이 변화는 누적된다. 사람의 내면은 손끝에서 표현된다. 이 기준에 의하면 아이는 그런 노동에 소질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신체가 너무 가녀리다.

여고생들의 생기 어린 재잘거림 속에도 고요한 섬이다. 수업 내내 바르고 꼿꼿한 자세인데 간혹 고개 들어 나를 보는구나 싶지만, 우리의 눈빛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힌 적은 없다. 마주 보면서도 아이의 눈빛은 묘하게 내 눈빛을 피해간다.

그러나 첫 시험을 보고 이 아이를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서술형 답지에 적힌 문장이 의외로 너무나 논리적이었다. 내 섣부른 판단이 깨지고 놀라운 기쁨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또 동시에 안타까움이 더욱 커졌다.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아이의 깊은 곳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나무의 모습을 살피는 것도 좋아하고, 매일의 변화를 살피는 것도 좋아한다. 내 교무실은 1층, 두 면이 통창이니 고개만 들면 초록으로 무성해진 나무들이 보인다. 나무들은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잎들을 풍성하게 펼치고 태양빛을 듬뿍 받아들여 열매를 크게 하고 단단하게 영글게 하고 있다. 여름은 그래야 하는 계절이다.

창가에 둔 화분들에도 여름이 왔다. 그런데 단풍나무는 아직도 잎눈을 달고 있다. 노지에 난 것을 화분에 담은 것을 얻었는데 어리지만 가지 뻗은 모습이 제법 멋졌다. 그런데 지난 여름방학 동안 잘 돌보지 못했다. 심한 가뭄에 가지들은 말라 죽고 10cm 정도의 중심 줄기만 남은 상태였다. 줄기도 마르지 않고 잎눈이 몇 개 더 생기는 것을 보니 살아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무 막대 하나 꽂아놓은 것 같은 볼품없는 모습이 되었지만, 교무실을 옮겨오면서도 데리고 왔다.

어제는 아이를 교무실로 불러 보았다. 담임도 아닌 과학 선생님이 왜 불렀을 거 같으냐고 물었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안 낸 게 많아서요.'라고 말한다. 나는 글씨를 너무 못 써서 불렀다고 했다. 더 진하게 써야 알아볼 수 있다고, 그런데 서술형 답지를 논리적으로 아주 잘 써서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다고 말해주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아이도 나도 급하게 교실로 가는데, 아이가 나를 앞서 계단을 성큼성큼 두 단씩 올라가 버린다.

앙상하던 나무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성해져서 경이로운 여름이다. 겨울에는 여름을 상상하기 어렵고, 여름엔 겨울을 상상하기 어렵다. 실제 자연의 변화는 상상 이상이므로 항상 놀랍다.

그런 나무들을 배경으로 여름까지 침묵하고 있는 내 단풍나무. 화분 흙을 헤집어 마른 정도를 확인하고 아주 가끔 물을 준다. 분홍빛 도는 잎눈 크기가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 커지고 있다. 언젠가는 다섯 손가락 닮은 앙증맞은 잎을 불쑥 펼치리란 믿음의 눈빛으로 앙상한 가지를 매일매일 쓰다듬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