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 괴산 애한정(槐山 愛閑亭)
한가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 괴산 애한정(槐山 愛閑亭)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20.01.0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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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괴산을 “조령과 유령 두 고개 사이에 있어 지세가 비좁고 협소하다. 동쪽으로는 큰 강과 닿아 있어 경치 좋은 곳과 이름난 마을이 많고, 높은 벼슬을 지낸 자도 많다. 땅은 오곡과 면화 농사에 적당하다.”라고 평한바 있다.

이처럼 많은 양반들이 괴산에 근거지를 두어 향촌의 대성(大姓)도 많고, 역사적으로 조선후기 유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고봉준령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남한강 상류인 달천으로 흘러들고 있어 산과 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애한정(愛閑亭)은 괴산읍 검승리 정자마을 언덕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정자의 전면에서 서쪽으로는 인접하여 괴강이 흐르고 주위로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소나무, 참나무 등 울창한 숲이 우거져 경관이 수려하다.

애한정은 박지겸(朴知謙, 154 9~1623)이 1614년(광해군 6)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모신 공으로 별좌(別座)에 올랐던 인물이다.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처의 고향인 이곳에 낙향하여 애한정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한 박세무(朴世茂, 1487~1554)가 그의 할아버지이다. 애한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박세무와 박지겸을 배향한 화암서원(花巖書院)이 있다.

정자의 이름은 그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호는 그 사람의 살아온 과정이나 신념이 반영되어 지어진다. 박지겸은 세속적 욕망과 일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살고자 했다. 그는 「애한정기(愛閑亭記)」에서 애한정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하고 애한정이라 이름 지은 연유를 설명했다. 그는 애한정에서 독서하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한가로울 때는 바둑과 거문고, 술과 낚시로 풍류를 즐겼다.

처음 지었을 당시의 애한정은 아래쪽에 남아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작은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애한정은 1673년(현종 14)에 박지겸의 손자인 박연준이 군수 황세구(1646~?)의 도움을 받아 새로 세운 것이며,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애한정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실 애한정의 평면구성은 일반적인 누정보다는 거주공간이 더 중시된 형태이다. 가운데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1칸의 온돌방, 그 측면칸 하부는 부엌, 상부는 마루방으로 구성하였으며, 우측으로도 `ㄴ'자 형태 온돌방과 배면으로 하부는 부엌, 상부는 마루방으로 구성하였다. 전면에 퇴칸 마루가 있어 각 실들의 통로로 연결되고 있다. 정면과 좌측면에는 들어열개창을 설치하여 주변의 경관을 완상(玩賞)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에는 정면 처마 아래에 `애한정(愛閑亭)'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고, 대청에는 주인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를 비롯하여 1674년(현종 15)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애한정이창기(愛閑亭移創記)'와 `제애한정기첩후(題愛閑亭記帖後) 등 많은 기문ㆍ시판들이 걸려 있다.

현재 애한정은 앞으로 4차선 교량이 지나고, 주변으로 괴산 농업역사박물관을 비롯한 복합 레저휴양관광지인 괴강관광지가 조성되어 예전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세속을 떠나서 자연을 즐기며 한가하게 살기를 원했던 옛 주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애한정은 현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천천히 여유를 부리면서 살아가라는 느림의 미학을 일깨워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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