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에서
강정마을에서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2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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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10월의 끝자락, 강정마을에서 길을 잃었다.
이곳은 육지와 뚝 떨어져 있는 섬. 그중에서도 남쪽의 끝이니, 한반도에서 가장 멀리 있거나 가장 앞장 서 있는 땅이다. 여행길에서도 새벽에 눈이 떠지는 습관이 다행인 것인지, 우울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육지에서 보기 어려운 흐드러진 새벽 별빛에 홀려 밖으로 나왔다. 인공의 불빛이 미치지 못한 새벽 하늘에 오리온자리, 큰곰자리, 전갈자리 등이 선명하고, 내가 미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별들이 하늘에 지천이다. 별 볼 일이 많은 제주의 새벽은 하늘도, 바람도 정갈하다. 숙소 바로 옆에서 흐르는 강정천의 물살은 바다를 만나기 직전 절정으로 흐른다. 그러니 흐르는 물은 새벽 정적을 흔들며 큰소리를 토해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정마을에는 아직 평화기도소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나무판자에 힘들게 써내려간 온갖 염원들이 풀죽은 모습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그 낡은 나무판대기에 적혀 있는 글들을 읽으면서, 내 기가 막혀 머리를 똑바로 들지 못한다. 어둠에 갇힌 바다에서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별로 긴장하지 않은 모습의 군인 한 명이 지키고 있는 항구 초입에는 ‘민군복합형 관광항구’라는 이정표가 뚜렷한데, 민(民)에 해당하는 백성의 흔적을 어둠 속에서 읽어내기는 불투명하다. 강정마을에는 ‘평화’라는 낱말이 여기저기 넘쳐 휘날린다. 나라 영토의 처음이자 끝인 강정은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곳. 호화 여객선 크루즈가 입항할 수 있으니 돈 많은 전 세계 관광객들이 강정을 통해 제주를 찾을 것이라는 자본의 유혹은 칠흑의 어둠에 갇혀 텅 빈 크루즈 여객항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곳에 ‘김영관센터’가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위풍당당하다. 강정마을은 여러 가지로 아이러니하다. 자연은 인공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되고 유린되었으며, 5.16 군사정변 당시 섬을 횡단하는 도로(5.16도로)를 만들었다는 공로를 칭송하는 김영관 제독의 영광에, 함부로 끌려와 맨손으로 도로를 개척했다는 당시 부랑자 및 불온으로 낙인찍힌 자들의 고통스러운 흔적은 없다. 8대 해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영관 예비역 대장은 군사정부 시절인 1961년 5월 제12대 제주도지사로 부임했고, 해군상륙함을 동원해 한라산을 관통해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도로를 만들면서 제주도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김영관센터’는 ‘민군복합문화센터’를 지향한다. 식당과 카페, 편의점, 체력단련장과 이동장병 숙소, 수영장, 다목적 코트와 홀, 독서실, 도서관의 위용을 갖춘 이 시설은 ‘상생’을 표방하고 있다. 김영관센터를 지나 강정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환하게 불을 밝히고 바다로 나가는 어선에 타고 있는 고단한 백성이 김영관센터를 이용하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의 나는, 1.2km의 길이에 너비가 159m에 달하는 ‘구럼비’너럭바위가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파괴되고, 그 자연훼손을 막기 위해 피눈물나는 저항을 하는 강정마을 사람들의 소식을 바다 건너 먼 육지에서 간간이 들으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어느 해 4월 3일. 사람의 목숨을 뛰어넘는 이념의 서슬에, 당시 제주사람 10명 중 한 명에 해당하는 2만5000~3만 명이 희생된 암울한 제주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강정항이 동북아 패권 유지와 중국의 견제를 위해 동맹국임을 특별히 내세우는 미국 야욕의 필요성이거나, 자주적 대양해군의 웅비, 혹은 비옥한 관광자원을 향한 욕망의 결합일 수 있다는 주장은 어둠에 갇혀 있는 밤바다에서 아직 건져 올리지 못하고 있다.
마침내 날이 밝아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서둘러 숙소로 발길을 옮기면서, 강정에서 길을 잃었다. 절묘하게 휴대전화의 에너지도 모두 사라진 어두운 새벽길. 사람을 찾아 모르는 길을 헤매다가 나를 구원해준 이는 강정에 사는 해녀. 먹고사는 일에 쫓기듯 열어야 하는 그 아름다운 사람이 길을 알려준다. 다행이나, 강정에서 나는 영영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10월이 다 지난다. 그래도 몇 사람쯤은 벌써 3년이 지난 광장의 촛불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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