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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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0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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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 울려퍼진 독립의 함성
이 우 석 <충주보훈지청장>

오늘은 88년 전인 1919년 2월 8일 적지(敵地)라 할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한복판에서 '재일본(在日本)조선유학생'들이 일제의 침략을 세계만방에 고발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사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 '2·8독립선언일'이다.

신학문을 배우고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유학생들은 배달의 민족이라는 민족혼을 가슴깊이 간직한 채 조선기독교청년회, 동경조선유학생 학우회와 같은 학생단체를 조직,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배일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끓는 젊음을 불태워 왔다.

2·8 독립선언의 전모를 요약하면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동경주재 각국 대사관, 공사관, 일본정부의 각 대신,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 각 신문사 등에 우편발송하고 오후 2시에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역원 선거를 명목으로 조선유학생대회가 열렸고, 여기에는 600여명의 동경유학생 대부분이 참가했다.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고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의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어 백관수가 '독립선언문'을,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는 등 젊은 유학생들의 독립을 향한 피 끓는 함성이 동경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일제에 의해 지도부가 검속되자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 일제의 국회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2월 12일 히비야(日比谷)공원 음악당에 100여명의 유학생들이 모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회장 이달을 비롯한 13명의 지도부가 검속되고 집회는 강제 해산당하는 등 2 ·8독립선언의 주체는 다양한 위치에서 각각 다른 형태의 반일투쟁에 헌신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3 · 1독립만세운동'의 촉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일제침탈에 항거한 독립운동은 2·8독립선언 이전인 의병투쟁으로부터 이어져 국내외를 불문하고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끊임없는 지속성과 다양성을 유지하여 왔고, 그 결과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렇듯 우리 민족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유의 민족정신인 민족정기가 서려있고, 나라가 어려울 때 몸소 민족정신을 실천한 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러한 분들께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개인간의 사사로운 정리에서도 보은(報恩)을 중시하는데 하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공헌 · 희생하신 분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며, 보훈이란 바로 이러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자신을 던져 나라와 겨레를 지키고 빛낸 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며, 이 분들을 존경하고 예우하는 풍토를 조성해 나가는 것은 국민과 더불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보훈문화가 정착될 때 우리의 미래는 밝고 빛날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그때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수상이 2차세계대전 A급 전범자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펴내고,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등 군국주의 부활에 앞장서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후세들에게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미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올바르게 심어주기 위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일은 소홀해서는 안 된다.

제 88주년 2·8 독립선언의 날을 맞아 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본받아 나라와 겨레를 위한 참다운 국가관이 무엇인지를 가슴깊이 느껴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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