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에 부는 바람
청보리밭에 부는 바람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11.2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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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한지를 잘게 찢어 한 알 한 알 보리 알갱이를 만들어 붙인다. 대각선의 보리 이삭을 따라 수염도 같은 방향으로 붙인다. 보릿대와 잎사귀도 같은 쪽으로 기울게 붙인다. 보리가 일제히 오른쪽으로 기울자 캔버스 위로 문득 바람이 일렁인다. 고향의 청보리밭에서 불던 시원한 들바람이다.

사월의 고향 들판은 청보리로 짙푸르렀다.

활엽수들이 이제 겨우 눈을 틔웠을 때 보리는 벌써 성장에 가속이 붙어 하루가 다르게 키를 키웠다.

모두가 잠든 엄동설한에도 삶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은 덕분이다.

부모님은 늦가을에 보리씨를 뿌리셨다.

거의 모든 식물이 깊이 잠든 겨울 초입에도 보리씨는 망설임 없이 싹을 틔운다. 저 여린 싹이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을까 걱정스럽지만, 보리는 움츠리지 않고 당당하게 추위 속으로 들어간다. 한 발 한 발 느린 걸음으로, 그러나 쉬지 않고 동토의 계절 한가운데를 통과해 누구보다 먼저 봄을 맞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리는 산 빛이 아직 신록에 머무는 오월에 벌써 이삭이 팬다.

그즈음 청보리밭에 바람이 일면 장관이 연출된다.

보릿대를 휘감은 바람을 타고 출렁이는 청보리밭의 리듬감은 마치 초록 양떼가 끝도 없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오월이 기울면 보리는 몹시 바쁜 발걸음으로 하루가 달리 실하게 영글어갔다.

마침내 잘 영근 보리는 쌀이 귀한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촌민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주었다. 모두를 잠재운 혹한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한 것은 양식이 바닥난 촌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함이었다.

유월에 들면 일제히 추수를 하는데, 보리를 빨리 거두어들이고 모내기를 해야 하므로 부모님은 잠시도 쉴 새 없으셨다.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일일이 낫으로 베고, 짚으로 묶어야 했다. 아버지는 그 많은 보리를 지게 가득 지시고 소의 등에도 잔뜩 싣고 집으로 나르셨다. 마당이 비좁도록 수북한 보리를 타작하는 날이면 부모님은 어둑새벽에 일을 시작하셨다. 윙윙-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방안에까지 북데기 냄새가 나면 우리도 일어나 보릿단을 날라야 했다. 언니는 타작하시는 부모님께 무거운 보릿단을 날라주고, 나는 타작이 끝난 가벼운 짚단을 한쪽으로 날랐다. 얼굴, 목, 팔, 다리 할 것 없이 찔러대던 보리 수염이 얼마나 깔끄럽고 성가시던지.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도 서럽거늘, 시대를 타고나는 운도 따르지 않았던 부모님.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을 고스란히 다 겪어내셨으니, 혹한의 겨울을 겪어낸 보리와 비슷한 삶이었다.

쌀이 귀할 때 주린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였건만, 쌀 만큼은 대접받지 못한 보리. 고단한 삶을 누구보다 정직하게 사셨지만, 대접 같은 건 받을 꿈도 꾸지 않으셨던 부모님. 그래서 보리를 생각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생각나는가 보다.

나는 사실 한지공예 같은 섬세한 작업과는 거리가 좀 먼 사람이다. 그런 내가 `청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작업하면서 한껏 조신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나의 보리 이삭을 완성하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 아주 꼼꼼한 작업이다.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몰두할 수 있을 줄 짐작하지 못했다.

한지 공예를 통해 모처럼 조신한 사람이 되어 본 이 시간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청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타고 먼 시공을 날아 고향의 청보리밭을 여행했고, 고향 집 타작마당을 만났고, 다시 그리운 부모님을 만난 의미 있는 시간을 내 어찌 쉽게 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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