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그해 겨울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12.1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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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안개, 안개 같은 시절이었다. 그때는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었던 뿌연 안갯속에 부유하던 시간이었다. 그 안갯속에 떠돌던 내게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온유한 미소로 날 믿어주셨던 선생님! 그분이 있었기에 부족한 내가 지금 이만큼의 자리에서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해 겨울, 난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서산의 작은 시골로 떠밀려 갔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들어간 그곳에서 나는 적지 않은 방황의 순간들을 보내야 했다.

선생님은 그 어둡던 시간들 동안 나에게 용기가 되고 힘이 되어주었던 분이었다. 마치 루소의 기다림의 철학을 실천이라도 하시듯 선생님은 그렇게 내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묵묵히 지켜봐 주셨다.

내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준 고교시절. 도시에서 작은 면소재지에 있는 신설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나는 오만함과 가당치 않은 자만심으로 건들거리며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공부는 늘 상위권이었지만 그 당시 나의 예민한 성격 탓에 그곳의 아이들과 섞이지 못하고 물 위의 기름처럼 떠다니며 힘든 기억들을 그려가고 있었다.

여러모로 황폐해진 집에서는 부모님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날도 집안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숨 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등교를 했었다. 다른 아이들은 보충수업을 듣기 위해 다른 교실로 자리를 옮겼고 난 수업을 빼먹은 채 텅 빈 교실에 찬밥처럼 서늘하게 담겨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시던 체육 선생님께 들켜 심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왜 내 잘못을 인정하기 거부했는지 모르겠다. 야단을 맞은 후 아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싸들고 무작정 교문을 빠져나왔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났지만 얼어붙었던 내 마음은 좀 채로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억지로 시골로 끌려 들어와야 했던 내 상황에 대한 반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나를 꾸중하지 않으셨다. “그래 넌 현명한 아이니까 믿는다. 잘 알아서 해라.”라는 한마디만 남기시고 어떤 질책도, 싫은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그 한마디가 그 당시 철없던 나의 가슴에 커다란 의미로 새겨졌었다.

‘날 믿는다. 나를 믿어주신다. 나를 이해하고 나의 모든 것을 신뢰하신단다. 그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은 빙산이 녹아내리듯 풀어지고 만 것이다. 그후 난 선생님의 수업시간엔 선생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살아있는 기쁨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고교시절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등줄기를 타고 얼음덩이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만약 그때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이 아름다운 별빛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으리라.

겨울 들녘을 거닐며 다시 한 번 그 시절을 생각한다.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내 지친 한숨을 토해내듯 서늘하게 내게 쏟아진다. 돌돌 거리며 흐르는 개울은 겨울 밤을 깨우고 별빛은 마당가득 떨어지고 있다. 그해 겨울 시골밤의 별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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