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내리는데
눈은 내리는데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3.12.0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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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바깥의 기척이 심란하다. 어제부터 간간이 내리던 비가 한밤중부터 함박눈으로 몸을 바꾸더니 하루 종일 멈추질 않는다. 강추위에 눈이 쌓이는 날이면 꼼짝없이 며칠은 집에 갇혀야 한다. 바깥으로 나가는 일도, 들어오는 일도 만만치 않다보니 사람의 발자국도 드문드문하다. 부득이한 일로 외출을 해야 한다면 버스를 탈 수 있는 큰 도로까지 삼사십 분은 족히 걸어야 해서 어지간하면 포기를 한다. 예정대로라면 오늘도 오전에는 외출을 해야 했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허리가 온전하질 않아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 도시에서는 골목만 벗어나면 큰길은 금방 눈이 녹아내려 불편함이 덜하지만 산속은 그대로 쌓여 해가 저물면 얼어붙고 만다. 한편으론 걱정이나 한편으론 느긋하다. 백포기가 훨씬 넘는 김장을 담갔고 메주도 서 말 가까이 쑤어 겉을 말리는 중이니 그 것으로 겨울준비는 다 끝나서다. 흰 눈 쌓여가는 정취만 하염없이 보고 있다. 어느새 겨울이라니, 속절없는 세월이다.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지금 무엇을 하시나요.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 추억의 언저리에서 행복 하세요’ 상념을 깨는 문자가 왔다. 절절하다. 내 마음을 어찌 알았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고 싶은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속내를 알기에 바로 답장을 했다. ‘외로움도 그리움도 눈 속에 묻어요. 눈이 녹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게’ 바람일 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가슴앓이라는 말은 흔적 없이 사라질 터이나 살아가는 재미는 덜 하겠다.

눈이 내리면 가슴속에 숨겨놨던 그리움이 대책 없이 고개를 내민다. 추워서 멀어져간 별도 아련하고 지나간 것들, 잊고 있거나 가깝고도 먼 곳에 있는 사람조차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진다. 그녀도 그러할 것이다. 함박눈을 홀로 바라보다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보낼 수 없는 문자를 내게 보내며 하소연하고 있는 거다. 사랑하기보다는 갈등의 시간이 더 많았을지라도 상대가 떠난 후 그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눈 내리는 날 삐쭉 고개를 내민 것이다. 사람과의 이별을 어떻게 마음에서 삭혀낼 것인가. 생애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날을 그리워하고 외로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의 행로일까.

멈출 기미가 없는 눈은 잠시 쉬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한다. 빈 나뭇가지를 흔드는 세찬 바람만 성난 파도소리를 내며 사라지곤 한다. 그때마다 밤나무와 굴참나무의 굵은 몸통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다른 소리가 섞이지 않으니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고요하다. 산마을은 눈이 내리면 침묵한다는 것을 이곳으로 와서야 알았다. 산속에 뿌리내린 나무들조차 눈 속에서 동안거에 들어가는 스님처럼 묵언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침묵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념만 가득해지니 눈 때문이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눈이 일상생활에 많은 불편을 준다는 것도, 잠시라도 세상의 더러움과 상처를 덮어주고 흑백사진을 펼쳐보 듯 지난 시간들과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반추하게 하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라는 것도 예전에는 몰랐었다. 눈 내리는 마당에서 하늘을 보고 짖어대며 펄쩍펄쩍 뛰노는 강아지처럼 그저 눈이 내리면 좋았었다. 허나 지금 눈은 내리는데 내게 문자를 보낸 그녀도 나도 끝없이 침잠하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깊은 나이가 들어야 지난 것들을 관조하며 편안해질까. 눈이 녹으면 심란한 마음도 잦아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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