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삽화
가을 삽화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3.10.29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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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노란 물감을 풀어놓으면 그리 빛깔이 곱고 처연할까. 가을 은행나무 아래에서는 감히 다른 어떤 빛깔도 고개를 내밀어 고운 척 입도 벙긋 못할 것 같은 도도함이다. 가을이 제법 여물어 바람에 찬기가 묻어나면 억새는 하얀 머리 풀어 은빛으로 살랑거린다. 미처 제 모습을 감추지 못한 달은 해의 모습에 놀라 주춤주춤 농익은 가을 하늘의 풍경이 된다. 이때쯤이다. 은행나무는 소슬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 나무 아래를 온통 범접 못할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그러다 어느 날 은행나무를 바라보는데 아! 한 잎도 남기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텅 빈 하늘에 빈가지만 무심히 흔들고 있다. 그 무심한 흔들림에서 무거운 짐 지고 목적지까지 와서 내려놓은 홀 가분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고 집착에서 막 벗어난 해탈의 경계에 이른 구도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에는 은행나무를 여기저기 볼 수 있어서 좋다. 더불어 유년시절 은행나무에 홀린 기억이 떠올라 늘 웃음 짓는다. 고향에는 은행나무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고물고물 아기손바닥만한 노란 은행잎은 책갈피 사이 끼워놓을 단풍잎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운동장 가득 플라타너스 잎이 제빛을 잃어가고 있을 즈음이다. 그날도 난로 불쏘시개로 플라타너스 잎을 줍고 있을 때 누군가 은행잎을 주우러 가자고 했다. 날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우리는 홀린 듯 은행나무가 있는 친구네 마을로 달려갔다.

커다란 나무였다. 황홀한 노란빛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은행나무의 위용에 겁을 먹고 잠시 멈칫 거리기도 했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신성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정성을 다해 은행잎을 주워 책마다 배불뚝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날 해가 저물도록 은행나무 아래를 맴돌며 놀다 친구네 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도 은행나무에 홀렸을 것이다. 누구도 어머니의 허락 없이 온 걸 걱정하지 않았다. 밥 때가 지나도, 밤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 때문에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는 걸 식구들이 들고 온 남포등 불빛을 보며 알았다.

전화도 없고 전기불도 없던 시절이었다. 남포등 불빛에 비친 식구들의 긴 그림자를 따라 논둑길과 샛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던 구불구불하던 그 논둑길이 왜 그리 멀게만 느껴졌는지, 당연히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을 줄 알았다. 어둑어둑한 등잔불아래 엄마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거라” 하시며 아랫목 이불속에 식을까 묻어둔 밥사발을 밥상에 꺼내 놓으셨다. 화롯불에는 된장 뚝배기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날 엄마 얼굴 가득했던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황금빛 은행잎보다 더 환하게 빛이 났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은행나무를 보면 미소를 머금은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지고, 화롯불에 보글보글 끓고 있던 못생긴 뚝배기가 떠올라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았다. 은행잎이 점점 노랗게 물들어가는 날들이 계속되면 남포등 불빛 따라 흔들리던 논둑길이 아른거려 가만있지를 못하고 노란 은행나무를 찾아다닌다.

인류가 지구상에 살기 훨씬 이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다는 은행나무다. 그래서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며 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간혹 오래된 은행나무를 마주하는 일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러면 지나치지 않고 은행나무를 살펴본다. 군데군데 옹이가 맺혀 있고 어떤 나무에는 세월의 더께인 이끼가 자라고 있어 숙연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은행나무 잎이 그리 곱고 처연한 것은 오랜 시간을 살아낸 세월의 무게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소슬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 한 잎 남기지 않는 것은 살아온 긴 시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의식 같은 것일 게다. `그리 보면 사람은 나무와 달리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을 살다 간다. 하지만 많은걸 가지려 욕심을 부리며 집착하기도 한다. 집착과 욕심으로 가득한 내 모습이 싫어서일까. 은행나무의 나목을 보노라면 무심한 그 모습을 닮아보고 싶다.

부질없는 욕심 훨훨 털어내고 가벼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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