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선물
퇴임 선물
  • 이효순 <수필가·청주 덕성유치원장>
  • 승인 2013.08.1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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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청주 덕성유치원장>

꽃집 여주인이 상아색 사각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어떤 교수님이 내게 보내준 퇴직 선물이라고 했다. 뜯어보니 DVD 네 장이 들어 있었다.

지난해에도 유치원 아기들과 함께 감상하라며 귀여운 애완견의 모습이 있는 영상과 음악이 곁들인 것을 보내주신 분이다.

그 DVD엔 좋아하는 클래식이 여러 곡 담겨 있었다. 고전음악을 좋아해 자주 듣고 싶어도 그런 여건이 잘 주어지지 않아 마음에만 그리던 것이었다.

모처럼 여유 있게 음악을 들으며 주말의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전해 받은 DVD를 컴퓨터에 넣고 마우스를 누르니 ‘숲 속의 물레방아’가 의 시원한 배경과 함께 거실 안을 가득 채운다. ‘뻐꾹 왈츠’ ‘가보트’등 오랜만에 귀가 호사한다.

그렇게 감상하고 싶었던 음악도 분주한 삶에 쫓기다 보니 내 생활주변에서 거의 멀어져 있었다. 젊은 날 자취생활을 할 때는 야외전축을 구입하여 엘피판을 참 많이 들었다. 퇴근 후의 시간을 그 일로 소일하였으니까. 그러나 선물 DVD는 직접 연주실황과 배경이 함께 담겨 있어 더욱 생동감이 넘쳤다.

음악은 늘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삶을 윤택하게 조절해 주었다. 주변이 삭막할 때도 음악을 들으면 어느새 차분해져서 안정을 되찾고 주변에 활기가 넘치게 된다.

음악과 자연, 그 속에서 삶을 엮어갔다. 생활 속에 음악이 없으면 건조한 삶이 지속될 것 같은 생각도 해봤다.

이런 것을 내게 보내주신 분은 얼굴도 한번 뵙지 않아 잘 모른다. 꽃집 주인을 통해 들은 것뿐인데…. 어찌 되었든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세상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자기 재능을 서로 나누며 사는 이들로 살맛이 난다.

이어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과 엘가의 ‘사랑의 인사’모두 귀에 익은 곡들이라 더 친근하게 들린다. 퇴임선물로는 안성맞춤이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8월 말 정년을 앞두고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조금 어수선하다.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이른 새벽부터 타이트하게 짜인 시간이 갑자기 멈춤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퇴임하면 무엇을 하느냐?” 묻는 것이 요즘 받는 인사다.

오래전에는 정년퇴직은 거의 노인의 대열에 입문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생각해왔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늘어나 퇴임 후에도 다시 제2의 인생설계를 할 수밖에 없다. 60대 초반은 노인 축에도 끼지 못하니 말이다.

먼저 퇴직한 남편은 미리 대비하여 학업과 본인이 하고 싶은 여러 가지를 열심히 해서 그날그날을 보람 있게 보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꼭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나에게 서서히 다가오니 그것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공감이 되었다.

지금 나는 여러 갈래 길에 서서 가는 길을 잡지 못하는 나그네의 마음 같다.

우선 손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악기 하나를 배우고 싶고, 평소에 떠나고 싶었던 여행도 하고 싶다. 늘 제대로 돌보아주지 못한 옥상과 계단, 뜰에 있는 꽃들이 있어 마음이 설렌다.

지인이 보내준 퇴임 선물, DVD의 고요하게 흐르는 ‘트로메라이’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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