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앞에는
세월 앞에는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3.05.13 2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마음이 조급했다. 출장 갔던 남편이 열흘 만에 돌아오는 날인데 하필 모임날짜와 겹쳤다. 오늘따라 공지사항이 많아 끝나고 부랴부랴 집으로 왔다. 밤 9시 30분이었다. 가지고 온 열쇠를 돌렸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오면서 보조키 쪽을 잠그고 나왔는데 이상하게 손잡이 문이 잠겨 있었다.

남편이 돌아왔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벨을 눌렀건만 한참을 기다려도 기척이 없다. 아무래도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내게 시위를 벌이는 것 같은 생각에 다시 두드렸는데 그래도 안에서는 종무소식이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벨을 누르고 손으로 꽝꽝 쳐대는데도 조용했다. 장난은 아닌 듯 하고 혹시나 하고 겁이 덜컥 났다. 출장가기 전부터 몸이 별로 좋지 않았던 생각이 났고 혈압약까지 복용하고 있는 터라 혹시 잘못되었나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119를 불러야 하나 앞집에 도움을 청해야 하나 금방 헤어진 언니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지고 당황스러웠다.

전화기를 꺼내려는 순간 집에서 인기척이 났다. 귀를 기울이니 어이없게도 코를 고는 소리였다. 내가 그렇게 벨을 누르고 문을 꽝꽝 쳐대는데도 거실에서 자고 있었던 모앙이다. 조금 전의 걱정은 사라졌으나 약이 올랐다. 핸드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걸면서 동시에 벨을 눌러 보았지만 코 고는 소리만 계속 날뿐 여전히 감감소식이다. 남편은 잠에서 깰 기미가 안보였다. 밤이라서 시끄럽다고 앞집과 아랫집에서 나올 것만 같아 포기하고 계단에 주저앉았다.

결혼 생활 2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남편은 무녀독남으로 자랐다. 신혼 때 자다가 일어나 보면 거실에서 혼자 자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하면 아무리 잠을 청해도 혼자 자 온 버릇 때문에 옆에 사람이 있으면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 상황은 작은아이가 서너 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것 때문에 참 많이 싸웠다. 지금은 옆에 없으면 편하고 좋은데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싫었었다. 남편은 모기 소리만 들려도 잠이 깨고 파리한마리만 날아다녀도 일어나 잡아야만 했다. 그런 사람이라 낮잠 한번 자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아홉시가 조금 넘은 이 시간에 저렇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는 게 참 당혹스러웠다.

어처구니없던 마음이 측음지심으로 변했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내 남편도 이제 늙는구나 싶은 생각에 한동안 심란했다. 출장가기 전 앞으로 우리는 실버타운에서 보내야 하는 세대일 것 같아 알아보니 분양가가 만만치 않다고 했다. 입주비 1억 5천만원에 한 달 관리비가 150만원이었다면서 열심히 벌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대학에 다니는 두 아이들 학비도 벅찰 텐데 나까지 공부를 하고 있으니 어깨가 왜 아니 무겁겠는가

부부가 나이 들면 측은지심으로 산다고 했다. 남편에게 측은지심이 생긴 걸 보면 늙었다는 증거인데 부정하고 싶지만 나도 이렇게 늙어가나 보다. 한 시간을 계단에 앉아 있으면서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잘 해 줄 것 하는 후회는 물론 지금까지 못해 준 것만 떠올랐다. 생각하니 신혼 때는 달콤한 애정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기고 생활에 찌들어 살다보니 걸핏하면 싸우고 그러다가 미운 정까지 들었다. 그나마 싸울 여력도 없이 지쳐버린 지금은 측은지심이 들면서 또 한 번의 고리를 꿰며 곰삭고 곰삭으며 살아가는 것이 부부사이라는 걸 알겠다. 3000년 만에 내려온 새가 바닷물 한 방울 쪼아 먹고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와 먹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물이 다 마르는 것을 1겁이라고 하는데 수십 겁의 인연이 있어야 부부로 만난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남편의 부스스한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 느꼈던 측은지심 어쩌고 한 마음은 간 곳 없이 한바탕 퍼붓고 났는데 금방 또 잠든다.

내일 아침에는 기운 좀 차리라고 향긋한 봄나물로 아침상을 차려 줘야겠다. 남편이 좋아하면서 먹을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행복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