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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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05.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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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오월의 달력에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녹음처럼 촉촉하게 가득 차 있다.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또래 상담부에서는 감사의 편지쓰기를 실시했다. 전교생에게 예쁜 편지지와 봉투를 나눠준 반 강제성을 띤 프로그램이다.

각반 또래 상담자들이 수거해온 편지를 부치기 전에 “한일 사랑의 우체통”이란 도장을 찍었다. 작업하는 내내 기특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했다.

미리 내보낸 안내장을 읽어본 학생이라면 충분히 요령을 이해했을 텐데. 겉봉투에 보내는 자신의 이름도 쓰지 않은 아이가 있는가 하면, 받는 부모님의 존함을 쓰지 않은 아이도 있다. 편지를 써보지 않은 아이들이 몰라서이기도 하겠지만, 할머니랑 사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이런 상황까지 온 것 같다. 그래도 독후감처럼 인터넷에서 베끼지 않고 창작했다는 자신들이 대견한지 상담실을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하며 언제 부치느냐고 성화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니 자신들이 스스로 신통방통한가 보다.

편지란 단어는 왠지 듣기만 하여도 설렌다. 빨간 우체통은 더더욱 정감이 간다. 우리 집 빨간 우체통은 편지 대신 여러 가지 고지서와 책자들만 입에 가득 물고 있고, 여기다 가끔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물고 있으니 얼마나 무거울까. 친필이지만 인쇄한 종이를 붙여 연말에 받아보는 연하장과 축하연에 축의금을 보내면 감사의 글로 화답해주는 지인들의 인사장, 아들이 군에서 보내오는 안부 편지는 집안에 가보라도 되듯 서랍 깊숙이 보관해 놓는다.

연둣빛으로 화사한 날, 상담실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부모님께 또는 담임이나 교과목 선생님께 편지를 쓰라고 안내문을 보냈는데도 이 아이는 내게 보냈다. 시설에서 다니고 있는데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날마다 두세 번은 얼굴을 봐야지 안심이 되는 아이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관심과 사랑을 혼자서 받을 수 있는 조건이지만, 이 아이는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시설의 선생님들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눠 줘야 하므로 독차지를 못할 것이다.

나는 유독 이 아이에게 마음이 쓰인다. 온종일 위 클래스에 나타나지 않으면 궁금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매도 맞는 초등시절을 보내다가 중학교에 들어오니 다른 세상이라고 했다. 친구들이 가끔 놀리기는 하지만 때리지는 않아서 좋다고 하였다. 햇볕이 활짝 나는 날은 우울하고 비가 내리는 날은 기분이 좋다는 아이, 점심시간에 배드민턴을 치자고 하면 교실에서 책이나 읽겠다고 하던 아이, 시설에서 휴일에는 제발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이, 대중가수 노래보다는 오케스트라연주를 더 좋아하는 아이, 우울증 약을 먹어서인지 매일 졸리고 기운도 없다고 말한다. 자그마하고 여리여리한 손가락을 만져보면 금방 부러질 것 같은 느낌이다. 플롯을 배운다며 가르쳐준다는 이 녀석을 나는 무조건 좋아했다. 닫고 있던 마음의 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지금은 상담실에 와서 곧잘 떠들고 책도 읽고 간다. 학교생활에 점점 적응하여 재미를 붙여가는 아이, 일주일에 두 번만이라도 상담해 달라고 한다.

의미 있는 날, 역사와 전통은 중요하지만 시대감각이 많이 변하였다. 첨단시대에 친필 편지가 촌스럽겠지만 학부모들은 자녀의 편지를 받고 감동했다고 이구동성이다. 편지봉투도 하나 제대로 못쓴다고 내게 구박을 받은 아이들이 속은 꽉 찬 모양이다. 아이들이 성숙하면서 감사와 은혜를 알게 되는 것 같다. 어떤 부모는 선물보다 편지가 훨씬 좋다고 하니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해마다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위 클래스가 좋아요. 날마다 가고 싶어요.” 수십 통의 긴 편지글보다 한 줄의 편지글이 더욱 의미 있는 날, 이 아이와 함께여서 기쁜 날, 나의 두 분의 스승님께 감사함을 일깨워 준 날, 은혜로운 날이다. 비개인 오후에는 둘이서 상담실 앞에 꽃모종이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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