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다는 것
잊혀진다는 것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9.10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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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용도폐기(用途廢棄)란 말이 있다. 쓸모가 없어지면 내다버린다는 뜻이다. 본디 물건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쓰다가, 그 쓰임이 끝나면 한쪽에 치워두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 배신이니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니 하는 감정적인 말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애당초 물건과 인간의 관계는 쓰임으로 맺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건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쓸모가 없어졌다해서 사람을 창고에 치우거나 내다 버릴 수는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쓰임만으로 맺어지는 게 아니다. 그 안에 정서적인 유대감이라는 복잡한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사람을 물건 취급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 여름 무더위에 사랑을 받다가, 무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가을이 되면 상자 속에 쳐박혀 있어야 되는 부채와 같은 신세의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은 어떠할지, 한(漢)의 궁녀였던 반첩여(班)의 시를 통해 볼 수 있다.

<원망의 노래(怨歌行)>

新裂齊紈素(신열제환소) : 새로 찢은 제(齊) 땅의 흰 비단

皎潔如霜雪(교결여상설) : 서리 눈 같이 희고 깨끗하여라

裁爲合歡扇(재위합환선) : 잘라서 합환선 부채를 만드니

團圓似明月(단원사명월) : 달 같이 둥글어라

出入君懷袖(출입군회수) : 임의 품과 소매를 들락날락하며

動搖微風發(동요미풍발) : 흔들면 작은 바람 피어난다네

常恐秋節至(상공추절지) : 늘 두려운 것은 가을철 이르러

凉飇奪炎熱(량표탈염열) :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빼앗는 것

棄捐협사中(기연협사중) :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져

恩情中道絶(은정중도절) : 님의 사랑이 중도에서 끊어지기 때문이지

부채를 빌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지만, 주인공의 신세타령을 눈치 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너무나 명료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에 부채의 인기는 단연 최고라서 범접하기 어려운 임의 품이며 소매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사랑을 독차지 한다. 한산 모시만큼이나 유명한 제(齊)땅에서 난 것으로 희고 깨끗해서일까? 달처럼 둥그렇게 만든 모습이 예뻐서일까 얼핏 그런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착각은 금물이다. 부채가 사랑 받는 진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을 시원하게 해주는 쓰임(用途)이 있기 때문이다. 명품 재질에 장인의 기능까지 더해져 최고의 부채가 되었지만, 부채는 부채일 뿐이다. 무더위가 사라진 가을철이 되면 부채는 대나무 상자()에 넣어 보관하게 되는데, 이른바 용도폐기(用途廢棄)이다. 젊은 시절 한(漢) 성제(成帝)의 총애를 한 몸에 받다가 조비연(趙飛燕)의 등장으로 황제의 관심에서 멀어져, 장신궁(長信宮)으로 밀려 나는 신세로 전락한 반첩여(班)와 오버랩 시킨 시인의 솜씨가 절묘하다. 젊은 미색(美色)만을 탐하는 천박한 수준의 황제나 그런 황제의 간택(簡擇)만을 기다리고 있는 첩여() 모두 봉건왕조 시대가 아닌 요즘 관념으로 볼 때,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있다. 바로 잊혀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잊혀지는 것은 모든 존재의 숙명이다. 정작 슬퍼할 것은 잊혀진다는 사실이 아니라, 나만 잊혀진다고 자학(自虐)하며 스스로를 가두는 일이다. 시대와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이 부채처럼 용도폐기(用途廢棄)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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