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식혀주는 올림픽 승전보
열대야 식혀주는 올림픽 승전보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2.08.05 2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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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부국장(천안)>

통쾌했다. 축구 종가의 콧대를 짓누르며 올림픽 세계 4강에 올랐다. 5일 새벽, 물러설 수 없는 연장 접전 끝에 맞이한 영국과의 승부차기. 한국의 태극전사들이 차례로 공을 찰 준비를 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승부차기에서 절대 유리하다는 선축을 잡은 팀은 영국이었다.

영국이 첫 골을 성공한 다음 나선 우리의 선발 키커는 구자철(23). 돌연 상대 골키퍼 잭 버틀랜드(19.버밍엄시티)의 이상한 행동이 카메라에 잡혔다. 영화 속 외계인처럼 파란색으로 변한 혓바닥을 내밀었다.

우리 선수에게 불쾌한 감정을 유발시키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그러나 구자철은 골키퍼의 시선을 외면하며 여유 있게 골을 넣었다.

버틀랜드는 우리의 세번째 키커인 황석호(23)를 마주한 채 또다시 심리전을 펼쳤다.

이번엔 혓바닥 말고도 손으로 머리 위 골대 망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골문이 20% 정도 좁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주 비신사적 행동이었다.

경고나 주의 등 제재를 해야 할 콜롬비아 주심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황석호는 위축되지 않고 강하게 공을 차넣어 다시 동점 상황을 만들었다.

백미는 기성용(23)과 버틀랜드와의 마지막 대결이었다.

이미 직전에 상대 선수의 실축으로 승기를 잡은 한국은 기성용을 다섯번째 카드로 내밀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임을 인식한 듯 버틀랜드는 가장 강렬한 '모션'을 취했다. 파란색 혓바닥을 상당히 오랫동안 내밀며 기성용을 노려봤다.

야유나 조롱의 느낌을 주는 이 동작을 역시 주심은 외면했다.

이어 기성용의 발끝을 떠난 공. 골문 중앙 우측 상단을 엄청난 속도로 파고들며 한국의 승리를 결정지었다.

쾌거였다. 단일팀까지 만들며 올림픽 축구 우승의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던 축구 종주국을 침몰시키며 한국선수들은 이날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축구 말고도 세계 스포츠계가 한국의 선전에 놀라는 종목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펜싱이다. 세계 정상 대열에 우뚝 섰다. 5일 종료된 펜싱 경기에서 한국은 금메달 2, 은메달 1, 동메달 3개 등 6개의 메달을 땄다.

이탈리아와 견주어 은메달 수만 하나 적은 세계 2위 성적이다.

매번 극적인 승리로 세계 팬들을 놀라게 했다.

김지연(24)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극적인 승리로 국민을 흥분시켰다. 펜싱 사브르 준결승에서 세계 1위 자구니스(미국)와 격돌해 초반에 무려 2대9, 5대12로 끌려갔다.

누가 봐도 패색이 짙었던 경기였는데 충격적인 반전이 시작됐다. 상대가 단 1점을 딸 동안 내리 10득점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남자 사브르 단체전 대표팀의 금메달도 세계 펜싱계를 경악하게 했다. 대회 최악의 오심 희생양이 됐던 신아람(26)의 에페 단체전 은메달 소식은 타 종목 금메달 소식보다 더 반갑게 들려왔다.

또 다른 숨은 영웅들의 승전보도 감격스럽다. 유도의 송대남은 선수 나이로 환갑인 33세에 세계 강호들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선사했다.

사격(25m 권총)의 김장미(20)는 0.8점차로 뒤진 결승 마지막 라운드에서 10.9 만점을 쏘며 승부를 뒤집었다. 이밖에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부상을 딛고 세계 4강에 오른 황희태(34)의 불꽃 투혼, 진행 중인 남녀 구기 대표팀들의 선전 등 연일 우리에겐 즐거운 올림픽이다.

2012년 8월, 푹푹 찌는 열대야에 전해지는 오밤중의 승전보들. 이들 태극 전사들이 없었으면 올해 여름을 어떻게 견뎌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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