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운아' 개혁을 좇아 삼일천하 이루다
'시대의 풍운아' 개혁을 좇아 삼일천하 이루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2.06.1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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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개혁과 개방의 선구자 김옥균의 출생지 논란
<상> 김옥균의 생애와 업적

신상구 천안중 교사(국학박사·향토사학자)

구한말 개혁과 개방의 선구자로 알려진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은 지금까지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김옥균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에서 출생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출생지에 논쟁이 일고 있다. 이에따라 충청타임즈는 국학박사이며, 향토사학자인 신상구 교사(천안중 사회과)를 통해 왜 김옥균의 출생지가 공주가 아닌 대전이라는 것인지 2회에 걸쳐 알아본다.

◇ 구한말 문충공 김상용의 10대손으로 출생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은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10대 손으로 1851년 음력 1월 23일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의 안동김씨(安東金氏) 문중에서 호군을 지낸 김병태(金炳台)와 은진송씨(恩津宋氏)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은 그의 외모가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짓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6세 때에 생부인 김병태의 결정에 따라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다. 11세가 되던 해에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 부사로 부임해, 양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의 송담서원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6세 때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온 후 더욱 면학에 정진하였다.

◇ 고종 10년 문과 알성시에 장원 급제

그는 남달리 총명하여 1870년(고종 8년) 초부터 한성부 북쪽에 있는 양반 거주 지역인 북촌(北村)에 드나들던 중인 출신 한의원 유대치(劉大致)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승려 이동인(李東仁)과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됐다.

그는 1872년(고종 10년)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그해 바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 그는 1873년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홍문관 교리를 거쳐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리는 바람에 옥당 승지(玉堂 承旨)와 정언(正言)을 지내고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1877년 김옥균은 백의정승이라 일컬어지는 의관 유홍기(劉鴻基)를 통해서 역관 오경석이 가져왔던 서적을 입수하여 탐독했고, 박규수·유홍기·오경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습득했다.

1879년 김옥균은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이동인의 여비를 대주어, 이동인은 그들이 제공한 돈으로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포함한 일본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때 이동인은 정보와 함께 일본에서 구한 각종 책들과 문물을 김옥균과 유홍기에게 제공했다.

그 뒤 김옥균은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개화당을 이루어 그 지도자가 됐다. 김옥균은 개화파에게 우호적이었던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등과 동지적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을 통해 국왕과 측근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설득, 호소했다. 그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면 부패의 척결과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신분차별을 완화할 것과, 문호를 열어 서구의 미지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근대화하는 길이 청나라나 외세로부터 자주독립 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 신사유람단과 수신사의 일원으로 도일

그는 1881년 12월 생가와 양가의 재산과 주변의 후원금 등을 모아 환전, 일본돈 2만 엔의 자금을 마련해서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도일했다. 신사유람단 일행은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이들은 일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각자 흩어졌다. 김옥균은 나가사키 현의 조선소, 제련소, 탄광, 금광 등을 시찰하고 채굴기계의 존재와 금속 가공원리를 파악했다.

이어 김옥균은 오사카(大阪)로 건너가서 군수기지 공장과 조폐국을 둘러보고 물자 운송용 차량의 존재를 접했고, 지폐 주조 기술을 목격했다. 이어 교토(京都), 고베(神戶)를 거쳐 1882년 3월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는 일본의 개화파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집에서 4개월 정도 머물면서 일본의 발전상을 관찰하고, 그와 담론을 나눴는데 조선인 청년들의 애국심에 감격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특히 김옥균과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김옥균은 귀국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후쿠자와를 통해 일본 정계와 재계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익과 함께 수신사의 고문 겸 부사가 되어 철종의 부마(駙馬)인 박영효,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서광범 등과 같이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됐다. 그는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의 조야(朝野)와 교제하는 동안 본국 개혁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그는 메이지유신으로 발전한 일본을 하나의 개혁의 본보기로 보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1883년 5월 인천항을 통해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에 일본이 재정을 늘린 것으로 군비에 투입하는 것을 목격했고, 정한론의 주장까지 일본 개화파에서 일부 나온다는 사실을 접하자 그는 이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서신을 통해 일본이 미구에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에게 알렸다. 귀국 후 그는 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했으며, 그들과 함께 개화독립당을 조직했다.

그리고 일본 유학생 파견과 군사 견습생 파견운동을 주도했고, 저서 '치도약론'을 집필했다. 이 책은 도로 정비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치도국 설치, 기술자 양성, 기계 구비, 오물 처리법 등을 포함한 17개 세목의 내용을 논하였고 이는 한성순보에 게재됐다.

특히, 김옥균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면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883년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해 서재필과 그의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도록 했다.

◇ 고종 22년 갑신정변 주도

김옥균은 박규수, 오경석 등으로부터 신문물을 접하고 서방에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開化)를 해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적 위정척사파들의 폐쇄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반대, 비판했지만 족벌체제로 변질되는 민씨 정권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비판했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조선이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 스스로 개항을 하여 외국의 선진문물과 장점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옥균은 처음에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추진했으나, 민씨 일족의 부패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의 벽, 청나라의 영향력 등에 부딪치자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급진개화파로 변신해서 1884년(고종 22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주도하다가 민씨 척족 수구파들과 위정척사파 양측의 방해공작과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하여 망명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했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결국 그는 구한말 개혁을 주도하다가 조선왕조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조선 정부에서 보낸 홍종우(洪鍾宇)에게 리볼버 권총으로 저격당해 4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시신은 선박으로 운구돼 강화도 양화진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 실종됐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인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의 생부 김병태는 연좌제에 의거 처형당하고, 모친 은진송씨는 음독 자결했으며, 김옥균의 부인 유씨는 딸 1명과 함께 관비가 돼 끌려갔다. 또한 이 사건으로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항렬자를 균에서 규로 바꾸기도 했다. 한편, 김옥균에게는 정실 부인의 딸 외에도 1894년 3월 사다라는 딸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사면·복권됐고, 아관파천 후 복권이 취소됐다가 1910년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시호는 충달이다.

그가 수구파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후 처음에는 일본 동경의 청산외인무덤에 묻혔는데, 1914년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했다. 그리고 그의 생가 터인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는 추모비가 설치됐으며, 1976년 충남도 기념물 13호로 지정돼 공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한편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는 머리털과 옷을 묻은 무덤이 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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