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긍지로 정암회 연계 '전통 잇는다'
한민족 긍지로 정암회 연계 '전통 잇는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2.05.31 2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거 형태 및 정책 과제 <하>
전형적 개척촌 형태 장방형 배치

신상구 <천안중 교사·국학박사>

이제는 지린성내 잘사는 마을로
90년대초 청주아리랑 사실확인
임동철 교수 '정암회' 조직 교류
충청도 방언·농악·풍습 등 보존
산업화로 빈집 ·초교 폐지 문제

정암촌은 전형적인 개척촌의 형태로 열지어 산자락 아래 평지에 장방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택의 평면은 거의가 1자형 통칸집이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거의가 초가집이고 연료는 장작과 석탄을 사용하고 가금류를 키우고 넓은 텃받을 가지고 있었다. 옥수수 창고와 엽연초 건조장 등 모든 부속 건물이 농촌의 실정에 맞춰 충분한 창고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담장은 바자울로 나무를 잇대어 묶어 만든 형태이다.

마을 주위에는 너비 4, 높이 8정도의 토성을 쌓고 그 위에 나무로 울바자(울타리를 만드는데 쓰는 것처럼 나무를 발처럼 엮어서 만든다)를 엮고 토성의 동서남북에는 포대를 쌓고 문은 남과 북에 한 개씩 내었다. 토성 주위에는 깊이가 1.7, 너비가 4 되는 해자(출입을 먹을 목적으로 성주변에 파놓은 물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러한 토성을 만든 이유는 당시에 자주 출몰하던 토비(산적)들을 막을 목적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당시 지배군이었던 일본군의 작전 목적에 따라 생산돼 비축된 양식의 외부 반출을 막을 목적이 더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군이 말하는 토비는 조선의 독립군이나 중국의 공산당이었기 때문이다.

남한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한 곳의 주거 특징은 북한 사람들이 살던 주거와는 다른 내부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함경도가 원류인 통칸형 정지가 있는 집 즉, 부엌(정지)과 방이 칸막이가 없는 형태가 아니고 방과 부엌의 칸막이를 가진 형태로 처음에는 외부에 툇마루가 있는 남쪽 고향에서와 비슷한 평면 형태였으나 혹한의 기후 조건 때문에 지금은 거의 사라져 약간의 흔적만이 남아 있고, 부엌과 방을 막았던 칸막이도 문화혁명을 지나면서 민족주의의 비판 때문에 그 주변의 주거 형태인 통칸형으로 개조돼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한중수교 이후 충북과의 인·물적 교류

1992년에 한중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정암촌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초이다. 당시 청주농악보존회장을 맡고 있던 충북대 국문과 임동철(64) 교수가 중국 옌볜대(延邊大)와 학술교류를 하던 중 정암촌에서 구전되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 과거 충북 청주지역에서 노동요로 불려지던 청주아리랑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지역 문화계는 "자칫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청주아리랑이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있다"고 반겼다. 임 교수는 이후 충북의 각계 인사들을 모아 '정암회'를 조직하고 정암촌에 장학금과 마을발전기금을 전달하며 인연을 쌓아갔고, 충북대와 옌볜대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충북도는 2000년 10월 정암촌 1세대 32명을 초청해 도내 친지들과 고향 상봉을 주선했다. 그리고 2001년부터 해마다 정암촌 농민을 초청해 도내 농장이나 식품가공업체 등에서 농업연수를 하고 있다. 청원군도 2002년부터 격년제로 이주민 2세들을 데려와 선진 영농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지역 문화계에서는 청주아리랑을 완전하게 복원해 내는 작업을 하고, 정암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청주민예총이 중국 조선족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극에 담아 청주아리랑 축제를 열기도 했다.

지역학계에서는 충북대 기초교육원 안상경 초빙교수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암촌에 전해지고 있는 청주아리랑을 문화관광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는데 성공해 200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문힉박사 학위를 받았다.

충북대 봉사단은 2006부터 6차례나 정암촌을 방문해 정암촌과 이웃 마을 양수촌(凉水村)에서 담장·대문 페인트칠, 마을길 청소, 밭일 등 궂은 일을 맡아 했다. 또 마을 소학교(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영어와 수학, 과학을 재미있는 놀이로 가르치는 교육봉사 활동도 했다.

충북도 자원봉사센터 의료봉사단도 정암촌을 찾아 주민들의 건강검진과 함께 진료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고향인 충북도민들의 지원과 교류가 이어지면서 정암촌은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1960년대식 낡은 초가집은 산뜻한 벽돌집으로 새단장 했고, 마을 안길도 말끔하게 포장됐다. 농업연수를 하고 귀국한 주민 중 일부가 고추장·된장 공장을 세워 운영 중이고, 마을공동 한우사육단지도 들어섰다. 2년 전 충북대봉사단이 노인회관 뒷마당에 만든 게이트볼장에서는 70, 80대 어르신들이 운동을 한다. 정암촌은 이제 지린성 내에서 가장 활기차고 잘사는 농촌 마을로 자리매김했다.

◇ 정암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문화 보존

정암촌 주민들은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을 겪었으면서도 한국의 충청도 사람들보다 더 충청도 사람답게 살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동북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이 급속히 산업화되고 도시화되어 농어촌이 점차 황폐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방언과 노래, 전설, 춤과 농악, 풍습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정암촌의 괄목할 만한 변화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사라지게 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귀틀집과 격자문을 갖춘 전통 양식의 초가집들이 점차 자취를 감춰가는 등 전통문화가 급속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북쪽에 서너채를 그대로 남겨두고 민속촌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충북도와 청원군이 마을 주민들 초청 연수를 통해 정암촌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키워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마을 젊은이들은 안정적인 소득원을 찾아 마을을 등지고 대도시나 한국으로 거주이전을 하고 있다. 지금 정암촌에는 빈집이 늘어나고, 초등학교가 폐교돼 민족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정암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암촌 주민들이 한민족(韓民族)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정암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좋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고 지금까지 계승 발전시켜 온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