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그리고 공권력
졸업, 그리고 공권력
  • 정규호 기자
  • 승인 2012.02.09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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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취재2팀장(부국장)

나는 교육현장을 다룬 영화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피터 위어 감독이 만든 '죽은 시인의 사회'를 꼽는다.

일류대 진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엄격한 웰튼고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1989년 만들어졌는데 그때 상황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학생들을 압박한다.

연기파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맡은 교사 키팅은 이 학교 출신으로 영어를 가르친다. 첫 수업부터 파격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키팅 선생님은 그 유명한 말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을 주문처럼 학생들에게 각인시킨다. 이 말은 나 역시 시험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딸들을 문 앞에서 배웅하며 함께 외치는 말이다.

이 영화에는 교육현장에서의 권위주의와 학교 뒷산 동굴, 그리고 시 낭독과 연극 등 인문학적 상상력, 입시 강박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안타까운 자살 등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닮은 이야기가 그려진다. 권위와 일류대 지향성을 타파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야 하는 키팅 선생님의 좌절과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밟고 올라간 책상, 그리고 이별사를 대신한 단 한마디 '오 캡틴, 마이 캡틴(Oh captain, my captain)'은 두고두고 의미심장하다.

흑인배우 시드니 포이티어가 주인공 태커리 선생님 역을 맡아 열연한'언제나 마음은 태양' 역시 매사에 반항적이고 문제투성이인데다 부임하는 교사마다 몰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는 빈민가 학생들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학교 현장의 이야기다. 문제 여학생 역으로 출연한 가수 루루가 부른 노래 'To Sir with love'는 지금도 귓가에 아련하다.

각급 학교에서의 졸업식이 한창이다. 그런데 지금 사회가 흘러가는 꼴을 보면서 '졸업은 인생의 새로운 시작' 어쩌고 하는 상투적인 말을 들려주기에는 심사가 편하지 않다.

소위 강압적 뒤풀이를 엄중 처벌하겠다는 경찰의 발표이 후 졸업식장에는 어김없이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면서 아직 성인이 채 되지못한 아이들을 감시한다.

급기야 "졸업식장이 무슨 조폭 결혼식장도 아니고 …" 운운하는 학부모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으며, 자식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학교에 나온 어른들까지도 잔뜩 주눅들어 종종걸음치는 일마저 빚어지고 있다. 학교폭력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정부의 강경방침에 따라 나타나는 이런 촌극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환치된 또 다른 폭력적 대응은 아닌지 곰곰 따져볼 일이다. 물론 신성한(?) 배움터에서 폭력이 난무한다는 일 자체는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가며 감시와 처벌을 통해 사태를 잠재우겠다는 발상은 마땅치 않다.

폭력을 공권력의 강제로 차단하겠다는 시도는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 그보다 선행돼야 하는 것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공권력이 아닌 감성을 통해 아이들을 이해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일탈문화를 무조건 백안시할 것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탈사회적인 행동으로 변질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이 정작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은 대학을 가거나 직장을 얻거나 하면서 성인이 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더욱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역시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런 끝이며 다시 시작인 졸업식장에서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의 서슬 퍼런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은 국가권력의 엄청난 위압이다. 그리고 공권력이 이처럼 삼엄하게 지켜보고 있으니, 감히 선을 넘어서겠다는 생각을 꿈도 꾸지 말라는 시위인 셈이다.

개성이고 나발이고, 민주주의 좋아하네. 학생 너희들은 이미 공권력에 포위됐으며, 앞으로도 어떤 불편한 표현의 자유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뼈속 깊이 새겨야 할 것임을 잊지 말라고 강요하는, 2012년 서글픈 졸업식장에 떨어진 노오란 프리지어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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