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과 수요집회
포항제철과 수요집회
  • 정규호 기자
  • 승인 2011.12.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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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부국장 (보은·옥천)

까까머리 중학생 때로 기억된다. 1970년대 초반이었고, 그때 나는 경주와 포항 등지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교실을 벗어나 난생 처음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그것도 한창 장난끼 심했던 친구들과 함께하는 그 경험은 짜릿한 설렘이 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줄줄이 외우지 못하면 불호령과 함께 치도곤을 당하기 일쑤였던 그 시절.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위업과 화랑도의 기상, 그리고 석굴암과 다보탑 등 찬란한 불교문화는 내 작은 가슴을 한껏 부풀려 놓았고 말 그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계기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검붉은 쇳물이 끓어 넘치는 용광로와 파란 가을 하늘을 위협하듯 치솟아 오른 포항제철의 높디높은 굴뚝이었다.

아, 그 놀라운 위용이라니. 가난이라는 단어에 익숙해 있고 도대체 이 작은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조바심을 단숨에 무너뜨린 포항제철의 위대한 그 바닷가 풍경은 어린 가슴을 커다란 희망과 포부로 들뜨게 했다.

그리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포항제철의 그 커다란 위용이 결국 36년 동안이나 일본에 지배당하면서 어쩌면 민족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 그 억압과 굴종에 대한 보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그래도 신화는 신화인 채로 포장되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때 당시만 해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철강 대국의 꿈은 오늘날 세계 선진국 대열에서 당당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신화를 만든 주인공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이 타계했다. 남다른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지금의 영광을 만들어낸 박 회장의 업적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는 화요일인 지난 13일 별세했고,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인 14일에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1000번째 수요집회가 개최됐다.

이 집회의 정식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이다.

1992년 1월 8일 처음으로 시작됐으니 햇수로는 꼬박 19년이 걸렸으며, 그 사이 우리는 굴욕의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의 새천년을 맞이하고 있다.

그 사이 정부에 신고 된 피해 여성 234명 가운데 이미 171명이 유명을 달리했으며, 63명의 살아 있는 피해 할머니들만이 남아 여전히 요지부동인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그 1000번의 피울음과 그보다 훨씬 커다란 상처가 남은 치욕은, 그러나 여태껏 씻기지 않은 멍울로 깊게, 그리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디 오욕으로 점철되지 않은 역사가 있으랴 마는 살아 있음이 결코 살아 있지 않음만 못한,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입 밖에 꺼내놓기조차 두려운 그 피울음은 철강신화를 만들면서 우리가 그래도 이만큼이나마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자부심으로는 절대 보상받을 수도, 위로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젊은 해양경찰관이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중국어선을 단속하다 그들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이 역시 주권이 침해당한 것이고 수산물을 얻기 위한 경제적인 탐욕에서 비롯된 일이니, 포항제철과 수요집회의 오버랩이 어찌 보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터.

결국 작은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 사이에서 주권국가로서의 당당함과 자존심을 힘과 절묘한 외교를 통해 세워 나가야 할 일일 터인데 역사가 길게 이어지면서도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음은 차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일본군 위안부, 정신대라는 그 피울음은 달래져야 하고, 또 다시는 이 땅의 창창한 젊은이들이 우리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지금 한반도는, 그리고 대한민국은 쌀쌀하다. 한복을 입고 일본대사관을 응시하는 소녀 형상의 청동상 어깨의 새와 그림자 가슴에 새겨진 나비가 그 쌀쌀하기만 한 날씨에 더욱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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