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혀있는 인연·번뇌 그곳에 내려놓다
얽혀있는 인연·번뇌 그곳에 내려놓다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1.07.18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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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속 사찰 어디?
선운사 윤대녕 '많은 별들이… ' 벚꽃 기다림 담아

부석사 이상문학상 수상 신경숙 사찰 가는길 그려

수덕사 춘하추동' 여류화가 나혜석 말년 고스란히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주인공이 발길을 옮기는 장소에 눈길이 멈추곤 한다. 아는 장소이든, 낯선 장소이든 독자들은 작가가 왜 그 장소를 등장시켰을까 궁금해 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사찰들 또한 마찬가지다. 얽혀 있는 인연과 번뇌를 덜어내고 싶은 소설 속 사찰을 찾아보자.

◇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윤대녕 저·생각의 나무)

선운사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소설 중간엔 "선운사 동구로 내려온 것은 4월 초하루였습니다. 동백장 여관에 짐을 풀자마자 나는 벚꽃부터 볼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지요. 하지만 여관 입구에서 매표소에 이르는 벚나무 길엔 아직 꽃은 피어 있지 않았습니다선운사 동백도 올해는 아직 피기 전이었습니다.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선운사 동백(冬柏)은 기실 춘백(春柏)이지요. 해도 이때쯤이면 피는 법인데 올해는 절기가 일러 아직 봉오리뿐이라고 경내에서 만난 스님이 말씀해 주시더군요."라는 대목이 나온다.

선운사(전북 고창군 아산면 도솔산)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의 본사다. '선운사사적기'에 따르면, 577년(백제 위덕왕 24)에 검단선사가 창건하였으며, 그후 폐사가 되어 1기(基)의 석탑만 남아 있던 것을 1354년(공민왕 3)에 효정선사가 중수했다. 1472년(조선 성종 3)부터 10여 년간 극유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했는데 정유재란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창건 당시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던 대가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79호인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있으며, 대웅전도 보물 제290호로 지정돼 있다.

◇ 부석사(신경숙 저·문학사상사)

2001년 제2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부석(浮石)', 즉 떠 있는 돌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작가와 다큐멘터리 프로듀서가 우연히 영주 부석사로 함께 자동차 여행을 떠나면서 겪는 미묘한 감정의 골을 다루고 있다. 부석을 통해 인간 관계에 내재한 단절을 그린 이 작품 속엔 부석사가 나오지 않고, 부석사 가는 길만 나온다.

부석사(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했다. 경내에는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무량수전 앞 석등 등 국보가 있다.

◇ 춘하추동(함정임 저·민음사)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의 삶을 모티프로 삼은 장편소설이다. 저자는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젠텔레스키의 책을 번역하다 나혜석의 삶까지 들여다 보게 되었고 지극한 애정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충남 예산 수덕사 입구에서 일주문을 통과하면 바로 왼쪽에 나타나는 초가집 한 채가 바로 수덕여관.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6년)은 1934년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수덕사에서 수행 중이던 친구 일엽 스님(1896~1971년)을 찾아왔다가 말년을 보냈다.

나혜석은 당시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에게 출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스님은 "임자는 중 노릇할 사람이 아니야"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나혜석은 여관에 정착, 수덕사를 거닐며 그림을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예술인들을 만나며 여생을 보냈다.

수덕사는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554~597)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제30대 왕 무왕 때 혜현이 '묘법연화경'을 강설해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 때 나옹(혜근)이 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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