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이형록 선생을 말한다
사진가 이형록 선생을 말한다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1.07.1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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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인영 (사진가)

“꽹과리 소리가 아무리 쉴 사이 없이 울려보아야 시끄러울 뿐이지. 가슴을 울리는 한 방의 징소리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는 뜨거운 내용성이 담긴 찬스라야 되는 것이다.”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 이형록 선생은 사진의 본질은 기록성에 있으며 그 특성은 사실성에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1917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선생은 10대 중반의 어린 시절, 형이 운영하는 사진관을 들락이면서 호기심 어린 눈을 뜨게 됐다.

때마침 부산에서 사진을 시작한 5살 연상의 임은식 선생이 강릉우체국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던 중으로 사진관에서 운명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차츰 사진에 매료된 이 선생은 1935년 임 선생과 함께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모아 사우회를 조직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사진 모임이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광선효과로 표현하는 풍경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1938년 임 선생이 부산체신청으로 떠난 이후 사우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가면서 향토색 짙은 시골마을의 사람 향기 나는 인물을 역광으로 찍는 등 본격적인 자신만의 작품활동에 들어간다.

그리고 선생은 사진 작업을 시작한 지 4년여 만에 전조선사진연맹이 주최한 살롱전에서 ‘산촌의 아침’, ‘전원’으로 입선했다. 당시 작품은 렌즈 앞의 후드를 빼고 촬영하는 기법으로 연초점효과를 냈으며, 농부의 모습과 구름을 조화롭게 형상화했다.

또 선생은 이보다 앞선 1936년 조선일보 주최 사진대회에서 입상했으며, 1937년에는 조선일보 ‘납량사진현상공모전’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광복과 더불어 돌아온 선생은 6.25전쟁 종군기자로 근무하면서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이때부터 리얼리즘 사진에 몰두하며 탐미적 취향의 사진에서 현실의 삶에 허덕이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이다.

리얼리즘 사진은 1956년 선생을 중심으로 손규문, 조규, 이안순, 정범태, 이해문, 한영수, 안종칠, 조용훈씨 등 17명이 모여 신선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다음해 ‘시장의 생태’란 주제로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작품전을 개최하는 등 리얼리즘 그룹전을 선보였다.

이후로 선생은 생활주의 리얼리즘구현 평가영향과 일제핍박,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접 겪은 현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6년 한국현대미술대전에서 ‘신문파는 소녀’, ‘건어’, ‘거리의 구두상’으로 주목받은 선생은 1958년 미국 US카메라지 주최 1회 국제사진공모전에서 입선하는 성과를 거뒀다.

1959년 신선회 해체 이후 1960년 정범태, 이상규, 김행오, 신석한, 김열수씨 등과 ‘살롱 아루스’를 창립한 선생은 구도와 빛, 피사체의 배치형식을 중요시한 조형성 리얼리즘사진작업에 몰두한다. 이는 한국 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한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리얼리즘에 대한 신념과 조형성이 추구됐기에 가능했으며, 한국사진 역사에 리얼리즘사진의 올바른 접근방식이 제대로 뿌리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사진가 1세대인 선생의 사진역사는 사우회를 시작으로 신선화의 꽃피음, 싸롱아루스의 성숙으로 이어져 1961년 현대사진연구회로 발전시키며 우리나라 사진계에 족적을 남겼다. 오랜 세월 사진과 함께 살아오면서 삶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천착해 온 선생은 지난 7월 2일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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