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3.2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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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우영지 <충주보훈지청>
오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다.
우리는 흔히 안 의사를 생각할 때 이토를 처단한 '10·26 의거'를 떠올린다.

하지만 안 의사는 20대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유산을 털어 학교를 두 개나 세워 민족 교육장을 만들었다.

일제의 침략이 가열되자 의병부대를 조직해 의병참모중장으로 최전선에서 싸우고 의열 지사들과 단지동맹을 맺어 살신구국을 다짐하고 이토 처단에 나섰다.

이토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겁박해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강탈한 국적 제1호였다.
의열 지사들이 그의 처단에 나섰지만 적의 수괴에게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토는 조선에 이어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만주로 건너갔다.

안 의사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하얼빈역에서 내린 이토에게 권총 6발을 쏘아 3발을 명중시키고 수하들을 쓰러뜨렸다.

안 의사 의거 뒤 열강의 언론은 일본의 한국침략 야욕을 규탄했고 일본의 만주침략 야욕에 분노하던 중국인의 가슴에 항일의지를 불 붙였다.

중국인들은 "우리의 원수를 안중근이 대신 갚아 주었다"며 기뻐했고 안 의사를 소재로 한 시, 소설, 연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더욱이 안 의사가 수감 중에,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당당한 태도와 항변, 논리 정연한 동양평화론 피력은 일본인 간수와 관리마저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으며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일본인 재판장에게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라고 비웃고 항소도 하지 않았다.

안 의사는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조국이 주권을 회복했을 때 고국으로 이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다시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고 두 아우에게 유언을 남기고 슬하에 둔 2남 1녀와 사랑하는 부인, 어머니를 동생들에게 맡긴 채, 찬비 내리는 뤼순감옥 형장에서 32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흰 한복을 수의로 입고 꿋꿋하게 처형대에 올라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조국을 걱정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밧줄을 목에 걸었다.

서거 38년 뒤 안 의사가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광복의 꿈은 이뤄졌고 100년이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대국의 반열에 우뚝 서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해결해야할 숙제가 남아 있다.

가장 큰 숙제는 고국으로 돌아와야 할 안 의사의 시신을 아직도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일제는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타나 유해 매장지를 찾아와 선서하는 등 안중근 의사 묘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유해를 비밀리 이장했거나 일본으로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이라도 '광복을 이룩하면 조국에 묻어달라'는 안 의사의 유언을 지킬 수 있도록 일본을 설득해 유해 매장 관련 기록과 사진 등을 찾아 안 의사의 유해가 고국 땅에 묻힐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우리나라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한 상태다.

남북통일이야 말로 안중근 의사가 남긴 숙제를 완성시키는 길이고 대한민국이 더 큰 역사를 열어 새로운 세계사를 써 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뛰어 넘어 사회정의와 동양평화를 기원하며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백년전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다.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국민 대통합을, 동북아 국가들에게는 공동 번영을 주문하며 겨레의 등불로, 평화의 횃불로 다시 부활한 우리와 함께 있는 대한의 아들이요, 대한의 아버지요, 대한의 청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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